문화
가마 속으로 산책가듯 천재 조각가의 정신을 엿본다
입력 2022-03-28 18:04 
권진규_자소상과 함께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아침(6-8시), 오전(10-13시), 오후(15-18시), 밤(20-22시)
하루일과를 시간 단위로 나누고 아침과 밤에는 구상과 드로잉, 오전과 오후에는 작품 제작을 하는 규칙적 생활. 절간 마당처럼 깨끗하기만 한 작업장.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일상은 어린 외조카(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기억에도 수행자와 닮았다.
대학강의나 재료 구매 외에는 외출도 삼가고, 식사 때 외에도 아틀리에(작업실)에서 종일 지낼 정도로 몰두했다. 침잠된 상태가 방해받을 때면 신경질적인 모습도 보였다. 작업을 마무리할땐 베토벤이나 드뷔시 등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아틀리에 옆 1.5평 골방에서 미술서적과 문학 등을 탐독했다. 대상의 본질을 좇는 그의 여정은 그리스 이집트 원시미술은 삼국시대 반가사유상과 무용총 벽화까지 동서양을 넘나들었고 그 흔적은 드로잉북과 작가 노트 등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권진규 탄생100주년 기념-노실의천사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火葬)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天使)처럼 나타나는 실존(實存)을 나는 어루만진다"
1972년 3월 일간지에 게재된 자작시 '예술적 산보-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을 통해 작가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실체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드러냈다.
교과서 속 잘생긴 흉상 '지원의 얼굴(1967)'로 널리 알려진 한국 대표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대 규모 개인전 '노실의 천사'가 5월 22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펼쳐졌다. 지난해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작품과 기록은 물론 이건희 컬렉션, 가나문화재단, 개인소장품까지 대여해 240여점이 모였다. 완벽주의 기질로 재료구매부터 끝작업까지 혼자 해냈던 작가의 동물상부터 여인상, 자소상, 부조, 추상작업까지 총망라했다. 방탄소년단 RM이 소장한 말 조각도 출품되 눈길을 끈다.
기사, 1953년경, 안산암, 65×64×31cm, 권경숙 기증,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독실한 불교집안 영향을 받았던 작가의 세계관에 입각해 입산(入山·1947~1958), 수행(修行·1959~1968), 피안(彼岸·1969~1973)의 세 시기로 구분했다. 사찰로 들어가는 일주문 형태 작품 '입산(1964-1965)'에서 출발해 5면이 다 다른 '기사(1953)', 형형한 눈빛이 살아있는 '자소상(1968)'을 거쳐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이다.
도모, 1951, 석고, 25×17×23cm, 권경숙 기증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이정훈.
특히 작가가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전시공간을 차용해 삼공블록과 벽돌을 쌓는 방식의 좌대 위에 작품을 놓아 관람객은 마치 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일본인 전처 도모와 선자, 영희, 순아, 현옥, 지원 등 여성상 모델은 모두 달라도 조각 속에 작가 본인을 투영해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하면서 본질에 가까운 영이 느껴진다.
고대부터 전해온, 1만년간 썩지 않는 테라코타로 작업하던 초기부터 방습, 방충에 강한 건칠로 제작할 말년까지 시종일관 영원성을 추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인 삼베로 거친 재질을 살리되 내부가 비어있는 건칠 조각은 이전 테라코타 형상과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말년에 경제적 궁핍과 몰이해로 복잡했던 심경이 거친 재질로 표현된 듯 싶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건칠(乾漆)을 되풀이 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자소상, 1969-70, 테라코타, 49×23×3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마무리 직전 영인본으로 드로잉과 작가노트가 펼쳐져 관람객들이 작가의 머릿 속을 탐험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함흥 갑부집 손자로 태어난 작가는 춘천공립중학교를 마치고 이쾌대가 설립한 성북회화연구소 수업을 거쳐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마무리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조각가의 길에 들어섰다.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앙트완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에게 사사하며 대상이 가진 여러 요소를 통합하고 구성을 통해 창조하는 조각을 추구했다. 유학 때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회장과 하숙한 인연도 있으나 궁핍 속에서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셌다.
지원의 얼굴, 1967, 50×32×2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존재의 본질을 추구했던 작가 태도에서 보면 예수상 머리 위에 불교를 상징하는 수레바퀴 형상이나 부처상의 상반신은 이생을 뜻하는 여래 부처, 하반신은 현생을 뜻하는 보살로 표현한 뜻도 새롭게 다가온다"며 "작가의 작품을 편견 없이 들여다보고 이 전시를 계기로 작가의 후속 연구가 더 활발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기증받은 권진규 작품을 보다 많은 관객과 향유하기 위해 광주 순회전을 기획했고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 상설전시장을 마련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작가를 기리는 행사도 다채롭다. 미술관 본관에서는 외조카 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와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가 특별도슨트로 참여한다. 첫날부터 문의전화가 폭주했다. 4월 7일 '콰르텟S특별연주회-권진규가 사랑한 클래식'과 4월 9일 기념학술대회가 열릴 계획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북구 동소문로 권진규 아틀리에도 매주 토요일 오후 특별개방될 뿐 아니라 강연, 음악회도 예정돼 있다. 최순우 옛집에서는 사진전이 함께 한다.
이후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7월 26일부터 10월 23일까지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1970, 건칠, 130×120×31cm,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소장 [사진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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