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타원형 알(egg)이 가득하다. 화려한 장식이 알 바깥에서 함께 섞이니 마치 부활절 달걀을 평면으로 펼쳐놓은 듯한 느낌이다.
알이 품고 있는 알파벳 글자가 첫 그림에서 하나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6개까지 증식해 화면을 꽉 채운다. 알 속 글자 21개를 다 모으면 6개 연작의 제목인 '결정발광(Crystalloluminescence)'이 읽힌다. 이 단어는 어떤 결정체가 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번쩍 하고 빛이 발산되는 현상을 뜻한다.
래리 피트먼 사진 브라이언 귀도 [사진 제공 = 리만머핀]
작가는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태초의 기원과 근미래가 병존하는 찰라의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알'은 긍정적인 희망이 넘치는 미래 사회에서 일종의 성공을 상징하는 기념탑처럼 그려진다.지난 2년간 코로나19를 계기로 도시문명의 변화가 두드러진 가운데 사시사철 빛이 넘치는 미국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나고 자란 작가 래리 피트먼(69)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미지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미국계 갤러리 리만머핀 서울이 한남동으로 이전한 재개관전이자 피트먼의 국내 첫 개인전 '불투명한, 반투명한, 빛나는(Opaque, Translucent and Luminous)'이 5월 7일까지 열린다.
Luminous_Cities with Egg Monuments1 [사진 제공 = 리만머핀]
리만머핀 관계자는 "지난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휘트니 비엔날레를 계기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 동시대 중요한 작가인데 국내에서는 덜 알려졌다"며 "글로벌 팬데믹으로 불안정한 도시 생활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의 역동성과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신작 위주로 소개했다"고 밝혔다. 당시 고 백남준 작가가 자비를 들여 유치한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은 '경계선'을 주제로 인종, 성, 소수인종의 정체성 등을 다루었다.Luminous_Cities with Egg Monuments 3 [사진 제공 = 리만머핀]
작가는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와 컬럼비아인 어머니와의 사이에 태어나 이질성이나 경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캘리포니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인테리어디자인회사에 다니던 그는 30대때 강도 습격으로 총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죽음과 폭력·억압의 역사를 화두 삼아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작가는 휘트니비엔날레에 4번이나 참여했을 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회고전과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 등에서 그룹전에 참여했다.Luminous_Cities with Egg Monuments 2 [사진 제공 = 리만머핀]
이번 전시는 제목처럼 1층부터 '불투명한' 연작과 '반투명한' 연작, 2층에서 '빛나는' 연작 순으로 이어져 펼쳐졌다. '불투명한' 연작이 다소 폐쇄적이면서 어두운 현실 세계를 그렸다면, '반투명한' 연작은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 같은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 같다. '빛나는 연작'은 좀더 밝으면서 미래적 희망이 넘치는 작품들이 모였다.Opaque Outsideof theEgg3 (2021) [사진 제공 = 리만머핀]
작품에는 중세부터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기를 거쳐 후기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과 함께 북미 인디언 부족의 민속예술을 연상시키는 패턴까지 역사적 상징이 다채롭다. 또 사람 얼굴과 새, 곤충의 형태를 지닌 생물체들이 공생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알과 눈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그림을 보는 관람객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현대 도시는 모계사회'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알은 여성성의 상징이다. 어떤 시작이나 기원일 수도 있고 순수한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뜻하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알 때문에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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