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A의료기관의 이○○ 씨, 강○○ 씨 조사 부탁드립니다."
16일 서울 대치동 DB손해보험 사옥 보상서비스실 보험사기특별조사팀(SIU) 지원파트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보험사기가 의심된다는 현장 조사관의 연락이었다. 이 회사의 신배식 보상기획파트 부장이 이 모씨의 이름을 입력하자, 몇 초 만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십 명과의 관계도가 떴다. 이씨와 A병원 간 관계도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수십 개 선의 굵기는 제각각이었는데, 굵을수록 관계가 긴밀한 것을 뜻한다고 했다. 대부분은 파란 선으로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특정인 간 몇 개의 선이 빨갛게 표시됐다. '보험사기'가 의심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분석 결과는 바로 조사관에게 전달됐다.
사고 피해보다 보험금을 과잉 청구하거나 있지도 않은 사고를 조작해 보험금을 타내는 보험사기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시스템이 걸러낸 셈이다. 매일경제가 17일 DB손해보험이 업계 최초로 도입한 보험사기 적발 프로그램 'DB-T 시스템'을 직접 체험본 결과 '뛰는 보험사기 위에 나는 빅데이터가 있는 격'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1000만 고객과 전국 의료기관, 정비업체, 보험 거래처, 사고 이력 및 보험금 청구 데이터 수천만 건을 학습한 빅데이터 시스템은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줬다.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 예를 들면 서울의 모 병원과 충청사업단의 보험거래처 B씨, B씨를 통해 가입한 고객 수십 명과의 관계가 지도처럼 한눈에 펼쳐지니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 등에서 봤던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광역수사대가 된 느낌이었다.
실손보험과 자동차보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당국과 업계는 보험사기를 근절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빅데이터와 머신러닝 분석이 '보험사기는 반드시 잡힌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업계에선 기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0년 보험사기 적발 금액은 8986억원, 적발 인원은 9만8826명으로 전년보다 각각 2.0%, 6.8% 늘었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 손해보험사 관계자는 "빅4 손보사가 1년에 지급하는 보험금이 10조원을 훌쩍 넘는데, 이 중 10%는 보험사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면서 "이로 미뤄 현재 보험사기 적발률은 3% 내외일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고 말했다.
AI 빅데이터 시스템으로 보험사기를 처리하는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신배식 DB손해보험 보상기획파트 부장은 "대부분 전직 경찰 출신인 SIU 직원들이 실제 사례를 조사한 후 보험사기 혐의가 포착되면 수사기관에 자료를 넘긴다"면서 "DB-T 시스템을 활용하면 이 데이터를 엑셀파일로 바로 내려받아 제출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사람이 손으로 입력하느라 닷새는 걸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상 보험사기는 보험금을 자주 타가는 사람을 조사하거나 보험사기 정황을 포착한 제3자의 제보로 적발된다.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스템은 '사회적 관계 분석(SNA)' 기법을 적용해 그동안 절대 파악할 수 없었던 보험사기 행각을 밝혀낸다. 가장 놀랐던 것은 최근 2년 사고 이력을 짧은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기범 김 모씨가 2020년 1월 박 모씨와 교통사고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났는데 6개월 후 차량에 동승하고 있었다는 것, 1년 후 다중추돌사고 현장에서 각자 차를 몰고 가다 함께 사고당한 것 등을 10초 만에 보여줬다.
이 시스템이 고도화되면 보험사기를 대거 적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 부장은 "전남 모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 보험금 청구가 급증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겠지만 DB-T 시스템으로 돌려 보니 부산 보험설계사 C씨의 모든 계약자가 전남까지 가서 하이푸와 백내장 수술을 받고 있었다. 이런 경우 전문 브로커가 가담한 보험사기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기는 연간 수조 원에 달하는 실손의료보험과 자동차보험 적자의 주범이다. 극히 일부 가입자가 보험금을 독식하면서 선량한 가입자들이 보험료 인상 폭탄을 맞고 있다.
작년 보험사들이 자동차보험에서 흑자를 낸 이유가 코로나19로 보험사기범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금융당국과 보험사들이 보험사기를 적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워낙 수법이 교묘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DB-T 시스템이 학습한 사례 중 최다 자동차보험 사기 연루자(의료기관, 정비업체 등 기관 포함)는 153명에 달했다. 최근 실손보험 적자 주범으로 떠오른 백내장 수술의 경우 모 안과가 3년간 2260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DB손해보험에서만 130억원의 보험금을 타갔다. 보험거래처 중에서는 2000건의 보험금을 청구한 모 지점이 의심 사례로 지목됐다.
복잡한 사고 처리 과정도 보험사기를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다. 자동차보험의 경우 개별 보험금 지급 건만 보면 정비 업체와 부품사, 사고 차량을 운반하는 레커 등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DB-T 시스템이 대전 모 정비공장의 관계도를 검색한 결과 신탄진에 있는 부품사, 모 렌터카 업체 등과의 연관성이 높게 나타났다. 부품은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의심스러운 관계가 포착된 것이다. 안성 모 정비공장에는 충남 모 레커 업체의 실적이 월등히 많은 점이 의심 사례로 지적됐다. 이 같은 의심 사례는 각 지역 SIU에 전달돼 집중조사 대상이 된다.
이 시스템이 빅데이터로 사람과 사람, 관련 기관의 관계를 분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년간 빅데이터를 분석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사망'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통상적으로 보험사기 조직은 여러 보험사 상품에 가입한 뒤 범죄 행각을 벌인다. 보험사마다 SIU를 두고 있는데 공동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DB-T 시스템은 DB손해보험 가입자 데이터만 볼 수 있지만, 의심 사례로 집계된 의료기관이나 정비업체, 보험거래처 등의 정보를 공유하면 다른 회사의 보험사기 적발률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보험사기를 근절하려면 회사별로 빅데이터를 정제·분석하고 머신러닝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투자금액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신 부장은 "2007년부터 SNA 시스템 도입을 고민했지만 '우리 회사 데이터만 가지고 되겠느냐'는 반대 의견에 매번 무산됐다"면서 "1000만 고객 달성으로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했다는 판단이 섰고, 최고경영자가 디지털 전환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과감하게 투자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찬옥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6일 서울 대치동 DB손해보험 사옥 보상서비스실 보험사기특별조사팀(SIU) 지원파트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보험사기가 의심된다는 현장 조사관의 연락이었다. 이 회사의 신배식 보상기획파트 부장이 이 모씨의 이름을 입력하자, 몇 초 만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십 명과의 관계도가 떴다. 이씨와 A병원 간 관계도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수십 개 선의 굵기는 제각각이었는데, 굵을수록 관계가 긴밀한 것을 뜻한다고 했다. 대부분은 파란 선으로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특정인 간 몇 개의 선이 빨갛게 표시됐다. '보험사기'가 의심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분석 결과는 바로 조사관에게 전달됐다.
사고 피해보다 보험금을 과잉 청구하거나 있지도 않은 사고를 조작해 보험금을 타내는 보험사기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시스템이 걸러낸 셈이다. 매일경제가 17일 DB손해보험이 업계 최초로 도입한 보험사기 적발 프로그램 'DB-T 시스템'을 직접 체험본 결과 '뛰는 보험사기 위에 나는 빅데이터가 있는 격'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1000만 고객과 전국 의료기관, 정비업체, 보험 거래처, 사고 이력 및 보험금 청구 데이터 수천만 건을 학습한 빅데이터 시스템은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줬다.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 예를 들면 서울의 모 병원과 충청사업단의 보험거래처 B씨, B씨를 통해 가입한 고객 수십 명과의 관계가 지도처럼 한눈에 펼쳐지니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 등에서 봤던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광역수사대가 된 느낌이었다.
실손보험과 자동차보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당국과 업계는 보험사기를 근절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빅데이터와 머신러닝 분석이 '보험사기는 반드시 잡힌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업계에선 기대하고 있다.
AI 빅데이터 시스템으로 보험사기를 처리하는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신배식 DB손해보험 보상기획파트 부장은 "대부분 전직 경찰 출신인 SIU 직원들이 실제 사례를 조사한 후 보험사기 혐의가 포착되면 수사기관에 자료를 넘긴다"면서 "DB-T 시스템을 활용하면 이 데이터를 엑셀파일로 바로 내려받아 제출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사람이 손으로 입력하느라 닷새는 걸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상 보험사기는 보험금을 자주 타가는 사람을 조사하거나 보험사기 정황을 포착한 제3자의 제보로 적발된다.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스템은 '사회적 관계 분석(SNA)' 기법을 적용해 그동안 절대 파악할 수 없었던 보험사기 행각을 밝혀낸다. 가장 놀랐던 것은 최근 2년 사고 이력을 짧은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기범 김 모씨가 2020년 1월 박 모씨와 교통사고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났는데 6개월 후 차량에 동승하고 있었다는 것, 1년 후 다중추돌사고 현장에서 각자 차를 몰고 가다 함께 사고당한 것 등을 10초 만에 보여줬다.
이 시스템이 고도화되면 보험사기를 대거 적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 부장은 "전남 모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 보험금 청구가 급증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겠지만 DB-T 시스템으로 돌려 보니 부산 보험설계사 C씨의 모든 계약자가 전남까지 가서 하이푸와 백내장 수술을 받고 있었다. 이런 경우 전문 브로커가 가담한 보험사기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기는 연간 수조 원에 달하는 실손의료보험과 자동차보험 적자의 주범이다. 극히 일부 가입자가 보험금을 독식하면서 선량한 가입자들이 보험료 인상 폭탄을 맞고 있다.
DB-T 시스템이 학습한 사례 중 최다 자동차보험 사기 연루자(의료기관, 정비업체 등 기관 포함)는 153명에 달했다. 최근 실손보험 적자 주범으로 떠오른 백내장 수술의 경우 모 안과가 3년간 2260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DB손해보험에서만 130억원의 보험금을 타갔다. 보험거래처 중에서는 2000건의 보험금을 청구한 모 지점이 의심 사례로 지목됐다.
복잡한 사고 처리 과정도 보험사기를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다. 자동차보험의 경우 개별 보험금 지급 건만 보면 정비 업체와 부품사, 사고 차량을 운반하는 레커 등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DB-T 시스템이 대전 모 정비공장의 관계도를 검색한 결과 신탄진에 있는 부품사, 모 렌터카 업체 등과의 연관성이 높게 나타났다. 부품은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의심스러운 관계가 포착된 것이다. 안성 모 정비공장에는 충남 모 레커 업체의 실적이 월등히 많은 점이 의심 사례로 지적됐다. 이 같은 의심 사례는 각 지역 SIU에 전달돼 집중조사 대상이 된다.
이 시스템이 빅데이터로 사람과 사람, 관련 기관의 관계를 분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년간 빅데이터를 분석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사망'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통상적으로 보험사기 조직은 여러 보험사 상품에 가입한 뒤 범죄 행각을 벌인다. 보험사마다 SIU를 두고 있는데 공동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DB-T 시스템은 DB손해보험 가입자 데이터만 볼 수 있지만, 의심 사례로 집계된 의료기관이나 정비업체, 보험거래처 등의 정보를 공유하면 다른 회사의 보험사기 적발률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보험사기를 근절하려면 회사별로 빅데이터를 정제·분석하고 머신러닝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투자금액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신 부장은 "2007년부터 SNA 시스템 도입을 고민했지만 '우리 회사 데이터만 가지고 되겠느냐'는 반대 의견에 매번 무산됐다"면서 "1000만 고객 달성으로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했다는 판단이 섰고, 최고경영자가 디지털 전환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과감하게 투자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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