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걸 전 서강대 공공정책 대학원 대우교수는 한때 루소와 마르크스의 사상에 매료되어 정치사상사의 넘나들기도 하고,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 소련의 붕괴를 직접 현장에서 목도함으로써 깊은 환멸과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미소 냉전 구도가 해체된 상황에서 저자는 정치과정론과 일본지역연구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설립한 아태평화재단에서 연구위원으로 각종 정책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던 그에게 파킨슨병이라는 병마가 찾아들었고 사회활동을 접은 채 칩거하면서 쓴 시와 소설이 바로 신작 '탱고'다. 한 인간의 내적, 이데올로기적 변천사를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단편 '하얀노트'에서 저자는 '회의주의'를 다룬다. "너무 쉽게 확신에 이른 사람은 잘나가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바뀌기 쉽다. 극우파 인사들 가운데 왕년에 극좌파였던 인물이 많다는 것 아냐?", "자신의 청춘을 다 받쳐 떠받들었던 이데올로기가 추악한 소수 권력자 집단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배신감과 분노가 생긴다. 다혈질적인 사람은 극우파가 되고 안으로 삼키는 사람은 허무주의자가 된다".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했던 저자가 겪었던 내적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난 비전향 장기수들 못지않게 전향한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향은 쉬운 일인지 아냐. 그것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구."
독자는 저자의 시선이 전자 '비전향 장기수'보다 후자 '전향한 사람들'에 꽂힌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오히려 전향하지 않은 허무주의자에게 용기가 없다는 비판을 은연중 제시한다.
단편 '의혹'에서는 차를 몰다가 할머니를 치인 사연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는 상황에서 한 아주머니의 증언을 듣게된다. 한 아주머니가 "저 할머니 수상해요.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뛰어들어 부딪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저자는 순간 할머니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만 끝까지 진실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진실 추구를 중단한다는 점에서 '하얀노트'에서 비판한 허무주의자의 모습이 '의혹'에서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단편 '불혹의 강'에서는 사랑했던 여인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던 주인공이 나이 40에 현실과 타협해 결혼했지만 과거의 연인에게 다시 연락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활동가들이 40세 전후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김홍경 뉴욕주립대 교수는 "변화와 시련을 겪은 뒤 이 친구(저자)는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정열보다는 화해와 포용을 이야기하고, 배타적 민족주의와 모든 형태의 교조주의를 거부하며, 배타적 이성이 아닌 종교와 운명을 포용하는 이성으로 다시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이하린 매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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