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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꼬꼬무' LA폭동, 코리아타운 방치한 美경찰 만행→한국 교민 활약상
입력 2022-02-03 23:52 
1992년 4.29 LA폭동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됐다.
3일 밤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열여섯 번째 이야기 ‘아메리칸드림 1992, LA 폭동 편이 전파를 탔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한 주류 판매점. 가게 주인은 42살 조성한씨. 보통 같으면 붐빌 시간에 그날 따라 손님이 없었다. 창밖으로 본 거리에도 개미 한 마리 없었다고.
그때 가게 안으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 이웃주민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너 뭐하냐. 가게 문 닫고 얼른 도망 치라"고 했다. 가게 안에 있던 TV를 켰더니, 충격적 생방송 뉴스 속보가 나왔다. 대낮 길거리에서 여러 명의 흑인이 백인 운전사 한 명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모습이었다. TV 속 장소는 바로 가게 근처였던 것.

조성한씨가 가게 문을 급히 닫고 차에 타 출발하려던 순간, 근처에 있던 흑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집까지 가려면 폭동이 일어나고 있던 대로를 지나야 했고, 기지를 발휘해야 했던 상황.
조성한씨는 곱슬머리에 물을 뿌려 더 심한 곱슬머리로 보이게 했고, 볼펜심 잉크를 뽑아 얼굴에 묻혔다. 얼핏 봤을 때 아시안인지 히스패닉인지 모르게 했고, 흑인 폭도인 척 했던 것. 결과는 대성공,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가게로 갔을 때, 가게 절반은 부서져있고 절반은 불에 타있었다고. 조성한씨가 10년간 일궈온 꿈이 모두 무너져내린 것. 당시 LA에 있던 한인 가게들이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LA 폭동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때는 그로부터 1년 전,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이 음주운전으로 잡혔다가 경찰들로부터 무차별적인 집단 폭행을 당했던 것. 경찰관 4명이 경찰봉으로 내리치고 발로 구타했다. 81초 동안 56번 몽둥이를 휘둘렀다고.
이후 로드니 킹은 같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가 됐다. 얼굴에 20바늘 넘게 꿰매고, 몸에 11 곳이 골절됐다. 뇌 손상과 청각 장애까지 얻었다.
폭행을 했던 경찰관들이 공개되면서 시민들은 더 흥분했다. 맞은 로드니 킹은 흑인, 경찰은 모두 백인이었던 것. 미국 전역이 들끓기 시작했고, 경찰들은 "로드니킹이 너무 심하게 반항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재판이 시작됐지만 관할법원이 갑자기 바뀌었다. 사건은 LA에서 일어났지만 재판은 64km나 떨어진 시미 밸리에서 하게 됐다고. LA엔 흑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시미밸리의 흑인 비율은 2%밖에 안되는 대표적 백인 거주지였다고. 배심원 12명 중 백인이 10명, 아시아계 1명, 히스패닉 1명이 있었다.
판결 결과,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를, 나머지 1명은 재심사 결정을 받았다. 사실상 전원 무죄였던 것.
이날 폭도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한 건 우리 교민들이 가게. 하지만 폭도들이 분노한 이유는 백인과 흑인의 갈등이었다. 왜 한국인이 타깃이 됐던 걸까.
당시 흑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다고. 흑인들을 도둑으로 의심해서 화가 난다는 'Black Korea'라는 노래가 100만장 넘게 팔렸을 정도. 그 당시 흑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멸시당한다고 느꼈던 것. 당시 흑인들의 인터뷰를 본 허니제이는 "그치. 저런 속 이야기가 있으면 또 속상할 수 있다"며 흑인들에게 공감했다.
장성규는 "게다가 또 우리 민족이 얼마나 부지런하냐"며 입을 뗐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와 근면성실하게 일하며 자리를 잡는 게 한국 교민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이 사는 지역 임대료는 너무 비싸, 상대적으로 싼 흑인 거주지역에 가게를 차리게 된 것. 당시 흑인 눈에 비친 한국인은 반갑지만은 않았다고.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형국.
하지만 모든 흑인과 교민이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닌데, 왜 유독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심했을까. 그 이유는 LA경찰이었다고.
당시 LA는 미국 경찰이 지켜주지 않았고, 결국 한국 교민들끼리 뭉칠 수밖에 없었다. 20년 동안 일궈놓은 삶의 터전, 코리아타운이 불 타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만 보자는 입장이었던 것. 우리 가게는 우리가 지키자는 생각.
교민들은 하나 둘 모여들었다. 손에 총을 들고. 근데 모두들 총을 잡은 폼이 자연스러웠다. 전부 33개월 군 복무를 마친 예비역 출신이었고, 심지어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던 분도 있었다고.
잠시 한국에 있던 특전사 출신 교민 제이슨 리는 폭동 소식을 듣자마자 LA로 다시 들어왔다고. 또 해병대전우회, 19~20살의 앳된 청년들까지 LA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모인 교민만 무려 300명. 그렇게 한인 자경단이 결성됐다.
한인 자경단은 임시대책본부를 만들고 구조 요청이 들어오면 조를 짜서 출동했다. 살상은 금지, 위협 사격만 하는 게 원칙. 자경단이 꾸려지자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들어왔다. 흑인 지역에 주류점을 하는 부부가 갇혔다는 전화가 왔고, 폭도들이 불을 질러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자경단이 부부를 구해 몰래 도망가는 순간, 흑인 폭도들이 뒤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제이슨리의 군화 뒤축에 총알이 박혔던 것.
이 코리안 워치팀은 뛰어난 활약으로 한국 교민을 지켰고, 이들의 활약에 미국인들도 깜짝 놀랐다. 현지 언론들이 앞다퉈 취재 경쟁을 벌였을 정도. 장항준 감독은 "이게 용기가 없으면 안되는 거다. 등 떠밀어도 안 나간다. 집에 가족들도 이는데"라며 감탄했다.
하지만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19살 이재성 군이 한인 가게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더 안타까운 건 총을 쏜 게 흑인 폭도가 아닌 우리 교민이었다고. 캄캄한 밤중 폭도로 오인해 총을 겨눴던 것.
하지만 미국 경찰은 코리아타운이 아닌 백인 부촌을 지켰고, 코리아타운은 방치했다. 비버리힐스와 할리우드를 봉쇄한 가운데 흑인들이 그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코리아타운을 공격했다. 미국 경찰은 당시 "인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알고봤더니 재판 이틀 전 이미 흑인 폭동을 예상하고 LA지역 경찰 철수를 계획해놨던 것.
또 폭동을 일찍 진압하면 흑인들을 더 자극할까봐 코리아타운을 방치했다는 사실도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결국 우리 교민들을 희생시켜 폭동을 잠재운 셈이었던 것.
그리고 일부 교민들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흑인과 한인의 싸움으로 변질시키려는 의도 아니냐'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생 전부를 걸고 뼈빠지게 차린 가게도 한순간 물거품이 됐던 것.
이후 LA는 물론 미국 전역과 한국에서 LA 교민들을 위한 성금이 몰렸고, 폭동이 휩쓸고 간 거리에 우리 교민들은 다시 모였다. 교민들은 한 손에 총이 아닌 빗자루를 들고 코리아타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또 'We want peace'를 외치며 행진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흑인과 히스패닉, 백인들까지 합세했다.
당시 상황을 겪었던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앵커는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한 10만명이 모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며 감회를 밝혔다.
장성규는 "교민들이 이 사건을 LA폭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냥 4.29라고 부른다더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폭동이란 단어를 쓰지 않기 위해서라고. 폭동이라 부르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게 되기 때문. 인종간 갈등으로 기억되는 게 싫어서라고.
장항준 감독은 "역사적으로 힘 대 힘이 맞붙는 일은 너무나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은 아주 드물었다. 이건 폭동을 계기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새롬 스타투데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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