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증거능력 제한되는 '피신조서'…대안으로 뜨는 '언더커버' 뭐길래?
입력 2022-01-01 07:38  | 수정 2022-01-02 09:52
신세계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영화 '신세계'에서 경찰청 수사기획과 강 과장은 청년 경찰 이자성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린다. 경찰 신분을 숨기고 기업형 범죄조직 '골드문'에 잠입해 위장 조직원으로 활동하라는 임무다. 이후 이자성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수년간 경찰에 조직의 범죄 정보와 증거를 넘겨준다. 이자성의 프락치 임무는 현실의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하다. 현행법상 경찰 등 수사기관의 언더커버(위장잠입 수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더커버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 간주돼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새해부터 시행되는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에 맞춰 경찰 지능범죄수사대나 검찰 강력부가 조직범죄나 중대범죄를 수사할 때에는 이같은 특별수사기법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1월 1일부터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이 제한된다. 기존에는 검찰 작성 피신조서가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돼 있다는 사실이 피고인 진술에 의해 인정되고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된 경우에는 증거능력이 인정됐다. 앞으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진술 내용과 다르다고 주장할 경우 경찰 조서와 마찬가지로 검사 작성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피신조서가 법정에서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로 인해 공범이 많고 복잡한 사건(보이스피싱, 폭력조직 등)의 경우 재판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피고인이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하면 피해자나 참고인을 법정에 불러 사실관계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피고인 신문을 법정에서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경 내에서는 언더커버를 확대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찰이 위장해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폭력조직에 6~12개월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증거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가 있다면 피의자 진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강력수사 전문 검사는 "보이스피싱의 경우 진술증거의 의존도가 높고, 조직범죄는 지금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기 일쑤인데 앞으로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되면 이들이 법정에서 무죄로 나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며 "대검이 이에 대응하여 영상녹화물이 법정에서 독립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도록 형사소송법 개정 노력을 하겠다고 했으나 실효성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 흔히 쓰이는 언더커버나 플리바게닝(유죄 인정 감형 협상)과 같은 특별수사기법 도입이 국내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0년 n번방 운영자 '갓갓' 문형욱이 잡힐 수 있었던 것도 대학생 '추적단불꽃'의 잠입 취재 덕분이었다. 추적단불꽃은 2019년 9월 탐사보도 공모전에 낸 기사를 통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수사기관은 언더커버를 할 수 없지만, 일반인은 언더커버를 할 수 있기에 추적단불꽃이 수집한 증거가 법원에서 인정됐다.
이 때문에 법이 개정돼 이제는 'n번방' 같은 사건은 언더커버 수사가 가능해졌다. 2021년 9월부터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에 한해 경찰이 신분을 비공개하거나 위장해 수사할 수 있는 언더커버 특례가 마련됐다.
청소년성보호법 일부개정법률에 따르면 경찰은 위장수사를 통해 △신분을 밝히지 않고 범죄자에게 접근해 범죄와 관련된 증거 및 자료 등을 수집할 수 있으며(신분비공개수사) △범죄 혐의점이 충분히 있는 경우 중 수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득이한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신분을 위장해 수사(신분위장수사)를 할 수 있게 됐다.
검경은 이와 같은 특별수사기법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검찰 피신조서가 증거능력이 제한되면서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폭력조직 검거에 앞서 증거 수집을 위한 언더커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국내에서도 언더커버를 폭넓게 허용하는 법안이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한국은 지난 2015년 국제조직범죄 방지를 위한 UN국제조직범죄방지협약(UNTOC)에 가입했다. 이 과정에서 UNTOC 및 부속의정서 기준에 부합하도록 영미법계 국가에서 시행 중인 언더커버나 함정수사 등 특별수사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특례법안이 발의됐으나 국회에서 계류하다 폐기됐다.
당시 특례법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찬성하는 측은 점점 고도화되는 조직범죄나 강력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수사기법을 지금보다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피의자 인권침해 등 윤리적인 이유로 특별수사기법 확대는 옳지 않다고 맞섰다.
[박윤예 기자 /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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