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립 경험에서 발견한 아름다움…그 속에 숨겨진 폭력성
입력 2021-11-01 08:38 
톰 안홀트의 2020년 종이 콜라주에 수채화 작품 `Climb Tomorrow(내일을 오르다) 17.9x23.8cm

화랑에 들어서자 이번 전시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첫번째 그림 '낙화Ⅰ(Fallen Flower Ⅰ)'가 일종의 중문처럼 맞이한다. 실내에 놓인 꽃병에 아름다운 꽃줄기가 몇 꽂혀 있지만 떨어진 꽃 하나가 시선을 끈다.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꽃은 사랑의 고독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주요 소재인 꽃병이 그림 위쪽에 치우쳐 있으니 어두운 배경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무언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톰 안홀트의 2021년작 수채화 `Window(창문)` 18x23cm
영국 바스 출신 작가 톰 안홀트(34)가 서울 삼청동 학고재 본관에서 '사랑의 서사'에 집중한 유화와 수채화 각 12점을 11월 21일까지 선보인다. 2년전 학고재 청담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코로나19 와중에도 런던, 베를린, 코펜하겐 등지서 열린 전시가 큰 호응을 얻어 주목받았다.
안홀트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슬픈, 부서진, 폭력적 이미지를 담아 첫 작품으로 걸고 싶었다"며 "단계적 과정(process)의 힘을 믿기에 작품과 작품, 전시와 전시가 이어지도록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와 음악을 제작하는 느낌으로 작품을 편집하거나 작품 배열 순서를 고려해 작업한다"고 설명했다.
톰 안홀트의 2021년 유화 작품 `The Stranger(낯선 사람)` 150x130cm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페르시아계 유대인 혈통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안홀트는 스톡홀름과 런던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베를린에 거주해 문화적 배경이 복합적이다. 그의 그림도 미술사와 가족사, 경험과 상상을 한꺼번에 담아낸 화면이 특징이다.
톰 안홀트의 2021년작 `Not Waving(인사가 아닌)` 115x75cm
그는 어릴때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 작품을 접한 것을 계기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서구 모더니즘과 가톨릭 기도서(Book of hours) 등 기독교 문화, 페르시아 세밀화(miniature) 요소가 평면적으로 담겨져 있다.
'2AM(새벽 2시)은 열정적 사랑에 달뜬 한 남자가 잠을 제대로 못이루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화려한 장식의 이불과 낭만적 느낌의 밤 풍경에도 불구하고 바로 아래 어둠의 자식 혹은 유령처럼 표현된 연인의 모습이 집착적, 폭력적 측면을 함께 드러낸다.
톰 안홀트의 `Fallen Flower Ⅰ (낙화 Ⅰ)` 170X150㎝ [사진 제공 = 학고재]
'The Stranger(낯선 사람)'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관객 시선을 끌어 함께 갇힌 느낌을 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바깥세상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동굴 속 덩치 큰 사람은 벌을 받고 헤매는 모습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영향 받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이면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본인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작품 `2AM`과 작가 톰 안홀트 [사진 제공 = 학고재]
작품 `Fallen FlowerⅠ(낙화 Ⅰ)와 톰 안홀트 [사진 제공 = 학고재]
MZ세대 젊은 작가답게 안홀트는 새로운 시도에 열려 있다. 이번 작품들에는 딸아이들이 스튜디오에서 낙서하는 모양새를 작품에 차용해서 작품 아래에 낙서가 깔린 듯한 윤곽이 잡힌다. 안홀트는 "아이들이 돌아다녀 작업을 중단할 상황도 발생하지만 그런 것도 작업 과정의 일부로 즐긴다"고 말했다.
그는 "그림에서 물감이 옛 그림처럼 벗겨진 듯한 느낌도 중요하다"며 "작품 속에서 시선이 통일성있게 흐르게 한다"고 전했다. 작가는 그림의 구조와 색 표현이 이야기와 동일하게 진행되게끔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두번째 전시장에는 작은 수채화 소품 12점에 유화 1점이 있다. 수채화 액자의 비율이 독특하다 싶었는데 베를린과 서울간 소통 과정에서 'Happy accident(실수)'로 가로·세로가 바뀌었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독특한 미감 덕에 앞으로도 이 비율의 액자를 활용할것 같다고 한다.
안홀트는 "수채화는 습작(studies)이 아니라 독자적 작품들"이라며 "콜라주하거나 실패작을 재활용하는 재미가 영화 편집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작은 수채와와 합을 겨루고 있는 유화 '인사가 아닌(Not waving)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속 남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벌거벗은 여인의 뒷모습은 언뜻 보면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는 또다른 '낙화'다. 또다시 사랑의 양가성을 확인하며 전시가 마무리된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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