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로 뒤덮은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의 가슴에는 불사조 모양 보석이 매달려 있다. 진주는 순수, 불사조는 불멸을 의미한다. 평생 독신으로 산 엘리자베스 1세는 이 두 가지와 검은색, 흰색으로 처녀 여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품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에 걸린 그의 초상화는 대영제국 토대를 만든 여왕의 위풍당당함을 보여준다. 손에 쥔 붉은 장미는 튜더 가문의 상징이다. 헨리 8세가 사형시킨 두번째 왕비 앤 불린 딸로 태어나 배다른 언니 메리 여왕의 견제로 런던탑에 갇혀 있었던 그가 왕조를 계승해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낸다. 스페인 무적 함대를 제압하고 유럽 최강국을 세운 여왕은 본인 이미지까지 세심하게 통제했다.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 그린 그의 초상화를 적외선으로 촬영한 밑그림에서 눈과 코 위치를 수정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그의 충신 월터 랠리는 1588년 초상화로 충성을 맹세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상징인 검은색과 흰색에 진주를 장식한 옷을 입고 있다. 그림 왼쪽 상단에 그려진 아주 작은 초승달은 달의 여신 신시아를 여왕에 비유한 것이다. 보존 처리 과정에서 초승달 아래 바다 물결이 발견됐는데, 달이 조류를 지배하듯 자신도 기꺼이 여왕의 지배를 받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시인이자 탐험가, 군인이었던 랠리는 '여왕의 남자'로 불렸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총애를 잃게 된다. 또 다른 충신 헨리 리도 1568년 초상화로 충성을 드러냈다. 여왕의 상징인 천체 문양을 수놓은 흰색 옷을 입고 있다.세 사람의 초상화를 비롯한 국립초상화미술관 전시작 78점은 인물의 특징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관계, 은밀한 역사까지 드러낸다. 이번 전시장 입구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화가 걸려 있다. 1856년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창립 당시 최초 소장품으로 셰익스피어 생전에 그린 유일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18세기 골동품 연구가 조지 버츄에 따르면, 테일러라는 배우이자 화가가 그렸으며 금귀고리를 착용한게 인상적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화.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초상화가 성정체성 전환을 알리는 '커밍아웃'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로 프랑스 외교관이자 군인이었던 슈발리에 데옹이 1792년 여성 드레스를 입고 그린 초상화다. 프랑스에서 간첩 혐의로 추방된 뒤 1785년부터 영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으며 펜싱기사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슈발리에 데옹.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소설 '폭풍의 언덕'을 쓴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와 소설 '제인 에어' 작가 샬럿 브론테 자매 초상화도 걸려 있다. 1834년 남자 형제 브란웰이 17세에 그린 것으로 또 다른 자매 앤도 함께 화면을 장식한다.앤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유화로 기록하던 인물 초상은 사진과 미디어 아트 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해왔다. 고대 양식 미니어처 기둥 사이에 서 있는 오드리 햅번의 1950년 로션 광고 사진, 모델 케이트 모스의 1993년 상반신 누드 사진도 눈길을 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3D 홀로그램 초상화는 실제 인물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런던에서 유학한 작가 크리스 러빈이 2012년 저지섬의 영국령 8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이다. 여왕이 2번 모델을 서는 동안 1만개 이미지를 촬영해 홀로그램으로 제작했다고 한다.영국 개념미술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제작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 초상화는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LCD(액정표시장치) 화면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무작위로 색을 선택해 화면이 변하기 때문에 같은 이미지가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초상화 기술 뿐만 아니라 표현 방법도 다채롭다. 세계에서 가장 그림값이 비싼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2005년)은 뉴욕 출신 큐레이터 찰리 샤이프스를 뒤에 두고 이젤 앞에 있는 작가 자신을 그렸다.
데이비드 호크니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인물 특징만을 부각시키거나 이목구비를 뭉갠 초상화도 눈에 띈다. 런던 출신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 초상화 '에이미 블루'(2011년)는 얼굴을 확대해 가장 자리를 잘라내고 엷은 청색으로 블루스 음악 영향을 표현했다.그레이슨 페리 '시간의 지도'(2013년)는 인생 경험과 감정을 드러낸 성곽 도시 지도 한가운데 아주 작게 얼굴도 보이지 않는 자화상을 그렸다.
전시를 기획한 양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림 한 점에 한 사람의 일생이 압축돼 있다"며 "초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정말 그 사람을 만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면 어떤 삶을 산 사람인지 궁금해지고 상상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15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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