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덴마크 성 외곽을 쓸쓸이 걷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마음 속으로 여러번 외치며 번민하고 있는 '우유부단의 대명사'를 말이다. 사색적이고 침울했으리라 어림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 분노로 폭주하는 미치광이 햄릿이 왔다. 정말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이성을 잃고 포효하는 모습이 길 잃은 한마리 사자 같다.
28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아비뇽페스티발시네마의 첫번째 상영작은 독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햄릿'이다. 아비뇽페스티벌은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적 공연예술축제 양대산맥이다. LG아트센터는 국내 최초로 필름 버전의 '햄릿'과 '리어왕' 등 5편을 5월 2일까지 무대 위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한다.
햄릿_Christophe Raynaud de Lage
제일 먼저 스크린에 올라온 '햄릿'은 가히 충격적이다. 검은 흙으로 가득 뒤덮인 무대는 묘지이자 난장판이 벌어지는 놀이터다. 햄릿은 흙더미에 자주 쓰러지고 흙을 입 속에 마구 넣는다. 사랑하는 여자 오필리아를 쓰러뜨려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극은 쏟아지는 비 속에서 흙을 파헤치며 거행되는 선왕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왕세자 햄릿은 아버지의 환영을 본 뒤 아버지의 왕좌와 어머니를 빼앗은 삼촌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햄릿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인물들의 불안한 내면을 클로즈업한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복수를 감행할 것 같던 햄릿은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하지 않는다. 단 여섯 명의 배우가 20여 명의 등장인물을 소화한다. 이를테면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흰 드레스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가 드레스를 벗으며 오필리아로 바뀌는 식이다. 정조를 버리고 남편의 동생과 결혼한 타락의 상징인 거트루드가 실은 순수의 상징 오필리아와 시시각각 몸을 바꾸는 설정이 흥미롭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의 복합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극이 상당히 거칠고 폭력적인 것에 대해서도 "폭력과 잔혹성은 연극 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전쟁의 시대인 오늘날에 더욱 그렇다"고 밝혔다. 다만 고전적 비극으로만 생각했던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무대를 휘저으며 분노를 쏟아내는 것을 2시간 넘게 보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 일이다. 5월 1일 낮 12시 공연. 러닝타임 2시간 25분.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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