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별세..."삶이 현대사" [사진 발자취]
입력 2021-02-15 12:14  | 수정 2021-02-15 12:18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향년 89세.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습니다. 향년 89세입니다. 여러 해 동안 심장 질환을 앓았고 지난해 폐렴 증세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습니다. 민중운동가이자 민족, 민주운동의 큰 어른, 통일운동가로 불립니다.

백기완 선생의 주민등록상 생년은 1932년이나, 실제 태어난 날은 1933년 1월 24일입니다. 통일문제연구소 측은 백 선생의 뜻에 따라 태어난 해는 1933년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은율군입니다. 학력은 초등학교만 나왔으나 독학으로 시, 소설 등 문학을 읽고 청소년기 무렵에는 영어사전을 외우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51년 해외유학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당시 전쟁 중인 조국의 상황을 고려해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백 선생이 해방 뒤 황해도에서 서울로 온 것은 13세 때입니다. 여덟 식구가 한반도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이 때를 백 선생이 통일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 계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8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뵙고 그의 뜻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쯤입니다.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고 도시빈민운동 등에 투신합니다. 스물두 살이던 1954년, 휴전 이후 ‘자진학생녹화대를 결성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나무심기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입니다. 7년 동안 대략 200만 그루를 전쟁으로 헐벗은 조국 강산에 심었습니다. 강원도 양양과 지리산 일대, 경기도 여주 등지에서 ‘자진농촌계목대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1957년에는 스물다섯 살 나이에 아내 김정숙 여사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50년대 강원도 양양에서 '자진학생녹화대'를 결성해 나무심기운동을 벌일 당시의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아내 김정숙 여사와 혼인 전 남산에 오른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은 1964년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 반대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함석헌·장준하·계훈제·변영태 선생 등과 함께 반일 투쟁에 나서며 연행,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1966년 윤보선·함석헌·장준하 선생과 함께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는 야권 통합운동을 이끌고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투옥됐습니다.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등산하다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과는 의형제 관계였습니다. 사망 현장에서 고인의 사체를 직접 관찰한 이후 장 선생의 사인이 암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의형제인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돼 군법재판을 받는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왼쪽부터 백기완, 장준하, 이철우.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75년 5월 초 소백산에 오른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1977년,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마흔다섯 살 무렵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포천 약사계곡 표지석 앞에 선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1979년 있었던 ‘YWCA 위장결혼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피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으려 하자 이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벌인 시위입니다. 백기완 선생은 주도 혐의로 이듬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여러차례 누적된 구속 수감과 고문 후유증으로 80kg을 넘는 건장한 체구에서 몸무게가 반쪽이되며 건강을 크게 해쳤습니다. 2019년 11월 서울고법 형사4부는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백 선생 재심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구속 수감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기 전 건장한 체격일 때의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1987년 2월 건강이 악화돼 한양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었던 박용길 장로가 면회 온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사가로도 유명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 선생이 옥중에서 쓴 장편시 ‘묏비나리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쓰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 씨가 작곡해 1981년 만들어졌습니다. 묏비나리는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수감됐을 당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15장에 걸쳐 작성했습니다.

아래는 묏비나리의 일부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중략)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어라”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선거 포스터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학로에서 연설하는 모습 / 사진 = 통일문제연구소

백 선생은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두 차례 모두 소속당 없이 무소속 민중후보였습니다. 87년 12월 6일 대학로 선거유세에서 백 선생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서는 민중세력이 앞장선 연립정부의 구성이 우선과제”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포함한 3자 회담을 가져 단일후보 옹립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92년 대통령 선거 때는 ‘셋집청 신설을 공약했습니다. 당시 국민당이 아파트값을 절반으로 내리겠다고 했으나 250조 원의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는 말 한마디 없다면서 셋집청을 신설하고 주택공개념을 도입해 50대 재벌로부터 회수한 땅에 6백만 채의 영구임대주택을 지어 집 없는 서민들에게 임대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여든에 가까워졌을 무렵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부산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는 1차 희망버스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한미FTA 협정 규탄집회에 참석했고 쌍용자동차 해고 규탄과 문제해결 촉구 범국민대회에 참여하는 등 노동운동의 현장 곳곳에 있었습니다. 2016년에는 여든네 살 나이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쉼터인 ‘꿀잠 건립기금 마련에 힘을 보태는 등 후대의 사회운동에도 끊임 없이 기여했습니다.

[ 신동규 디지털뉴스부 기자 / easternk@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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