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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김응용, 그를 지탱한 건 ‘자존심’이었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입력 2020-12-10 14:32  | 수정 2020-12-14 11:43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이 내년 1월, 65년 야구인생을 마무리한다. 그는 야구인들의 자존심을 지킨 영원한 "코감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진=MK스포츠 DB
MK스포츠 김대호 기자
김응용 선수에서 감독, 사장, 회장까지. 그가 걸어온 긴 세월 만큼이나 직함도 인생의 무게를 담아 왔다.
1.4 후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남쪽으로 내려 온 소년은 부산 개성중학교 2학년 때 순전히 덩치가 크다는 이유 하나로 야구 방망이를 잡는다. 당대 최고의 홈런왕에서 한국야구 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 감독(1977년 제3회 슈퍼월드컵대회).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1567승) 및 최다우승(10회) 감독. 올림픽 첫 메달 감독(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경기인 출신 첫 프로야구단 사장(2004년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2016년~현재).
김응용 회장이 내년 1월, 4년 임기를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만 80세. 숨 가쁘게 달려온 김응용의 65년 야구인생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부산상고를 졸업하던 1960년, 실업야구 명문 농업은행에서 퇴짜 맞은 것을 빼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로서 김응용 처럼 성공한 인물은 찾기 쉽지 않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자존심이다. 김영조 농업은행 감독이 뒤늦게 김응용의 진가를 발견하고 입단제의를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사실은 유명하다. 1977년 슈퍼월드컵대회에선 박상규 단장(당시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이 감독에게 번트 지시를 내리자 네 타자 연속 번트를 댄 일화도 있다. 슈퍼월드컵대회 우승 후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꼿꼿이 선 자세로 악수를 해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식은땀을 흘리게 한 일도 있다.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룬 뒤 재계약을 앞두고 계약금은 안 받아도 좋으니 연봉은 김영덕 김성근보다 일 원 한 푼이라도 더 달라”고 요구해 끝내 관철시켰다. 해태 감독 시절 가난한 저 연봉 선수들을 구단도 모르게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면서 돌봐준 적도 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을 맡은 이후 4년 동안 무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번도 협회 법인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다. 대신 사비 1억 원을 협회에 출연했다. 부임 전까지 단골 ‘사고단체였던 협회를 아무런 잡음 없이 이끈 데에는 철두철미한 자기관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일선 지도자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실행에 옮긴 고교생 투구수 제한은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소형준(kt 위즈) 이민호(LG 트윈스) 원태인(삼성 라이온즈) 서준원(롯데 자이언츠) 등 고졸 대형 투수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야구계 전면에서 사라지지만 영원한 야구인으로 남기 바란다. 입버릇처럼 얘기해 온 어딘가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야구장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지휘해 본 적이 없다.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는 자리를 누리지 않았다. 지켰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MK스포츠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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