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주의 세력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중국 정부와 홍콩 특별행정구가 미국 대선 이슈로 글로벌 감시와 견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폭주기관차처럼 홍콩 민주주의 진영을 탄압하고 있다.
미국 대선 직후 홍콩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초법적 조치가 취해진 데 이어 최근까지 홍콩 내 반중 시위대 인사 23명이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선거 전에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해 탄압 수위를 조절했던 것과 달리 "이 때가 기회"라는 식으로 속전속결식 탄압을 취하고 있다는 평가다.
홍콩 민주세력 탄압 사태에 침묵해온 '민주화 선배' 국가인 한국은 여전히 관전자 모드 속에서 25일 왕이 외교부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한 문제를 논의한다.
■ 감옥으로 끌려가는 시민활동가·언론기자·야당정치인
25일 홍콩자유언론(HKFP),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영국 인디펜던트 등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과 홍콩 당국은 11월 3일 미국 대선 이후 유례없는 민주진영 탄압몰이를 하고 있다.
선거 일주 뒤인 지난 11일 홍콩 의회인 입법회 내 '반중 목소리'를 내는 야당 의원 4명(궉카키·앨빈 융·데니스 궉·케네스 렁)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이는 본토인 중국의 결정에 따른 조치로, 이날 중국 최고 입법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애국심'을 골자로 하는 홍콩 입법회 의원의 자격요건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의원직 박탈이 이뤄졌다.
지난 6월 30일 전인대 상무위가 15분만에 홍콩보안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시진핑 주석 서명을 받아 다섯 시간 뒤인 오후11시 캐리람 홍콩 행정장관 서명으로 무소불위의 홍콩보안법을 발효시킨 것과 판박이였다.
지난 23일에는 조슈아 웡을 비롯한 홍콩의 청년 활동가 3명이 법원의 확정 판결에 앞서 전격 수감됐는데 이 역시 미국 대선 이후 홍콩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견제가 소홀해진 상황에서 이들 청년 활동가들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내린 절박한 선택이었다.
이들은 홍콩 시위 사태 초기인 지난해 6월21일 홍콩섬 중심가 완차이 지역에 자리한 경찰청사 앞 시위를 선동·조직하고, 불법시위임을 알고도 참여한 혐의 등으로 각각 기소됐다. 조슈아 웡 등인 해당 혐의를 일체 부인해왔는데 이날 느닷없이 그간의 입장을 바꿔 혐의를 시인해 수감됐다.
조슈아 웡은 "우리의 투옥이 홍콩의 사법체계가 중국 당국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점에 국제사회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혐의를 시인한 배경을 설명했다. 웡은 또 미국 선거 이후 지난 3주 간 민주화 활동가, 야다아 정치인 등 무려 23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매일같이 감옥으로 향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는 24일자 신문 1면에 조슈아 웡 등이 수감되는 사진을 실으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홍콩 행동주의의 얼굴'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 견제받지 않는 중국·홍콩, 되레 미국과 동맹국에 협박
대선 전까지 중국과 홍콩을 상대로 최대 압박을 취했던 트럼프 행정부는 선거 이후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탄압 사태에 대해 입을 닫은 상태다.
유일하게 동맹국 중 영국만이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탄압 중단을 촉구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오히려 내정간섭을 주장하며 비자 취소 위협 등 되레 역공을 취하고 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공개된 영국 외교부의 '1월 1일~6월30일까지 홍콩 관련 6개월 보고서'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면 중국 본토에서 기획된 홍콩 국가보안법이 고도의 자치 시스템을 추구해온 홍콩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으로 규정됐다. 영국 정부는 중국의 반발 입장과 관계 없이 앞으로도 홍콩 시민들에 책임감을 가지고 홍콩인들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영국의 가치와 약속을 계속 지키겠음을 이 보고서에서 분명히 했다.
그러자 중국 외교부 홍콩 위원회는 즉각 "홍콩 내정에 간섭하는 오래된 식민지의 꿈에서 깨어나라"며 영국을 향해 비난 성명을 냈다.
이도 모자라 중국 본토에서는 중국과 영국 간 유효하게 인정돼 온 '영국해외시민'(British National Overseas·BNO) 여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인디펜던트 보도에 따르면 중국 외교부는 최근 "BNO에 대한 우리의 보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인식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홍콩시민 약 30만 명이 BNO 여권을 소지 중으로, 영국은 민주주의 탄압이나 정세 불안을 이유로 이들 여권 소지자가 영국에 시민권을 신청할 경우 이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 침묵하는 '민주화 선배' 韓…日 아베는 반발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처럼 홍콩 민주진영 탄압이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지만 한국 외교부에서는 어떤 우려의 입장도 나온 바가 없다. 공교롭게도 이날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한국을 찾아 시진핑 주석의 향후 방안 문제 등을 논의하는 흐름이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서는 "중국이 올해 내내 일본과 한국을 상대로 시진핑 주석의 방문 이슈를 들이대며 홍콩 이슈에서 아시아 역내 감시망들의 관심을 흐트러뜨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제는 퇴임한 고위 외교가 인사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민주화 선배 국가인 한국이 홍콩 사태를 관망만 하는 것은 국가 이익을 떠나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라고 걱정을 쏟아냈다.
더 민망한 현실은 같은 '관전자'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일본마저도 홍콩 사태를 둘러싼 국가 수반의 염려 입장을 낸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국가보안법 이슈가 쟁점화하자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9월에 열릴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홍콩보안법 관련 공동성명 발표를 일본이 주도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명의 내용과 관계없이 홍콩보안법 이슈를 국제사회가 주시하고 있음을 환기시킨 아베 총리 발언으로 일본은 "국제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 이슈에서 왜 일본이 침묵하고 있느냐"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었다. 반면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시스템을 안착시키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된 한국이 지속적으로 홍콩 탄압 사태에 침묵하는 문제는 향후 미래 세대가 읽을 역사 교과서에 기술될 수도 있는 문제다.
한·일 양국이 시진핑 주석의 국반 방문 문제로 연초부터 중국의 외교적 포로가 돼 왔다는 사실도 민망한 장면이다.
일본은 당초 올해 4월로 시진핑 주석의 방일이 예정됐다가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되면서 지금까지 방일 일정이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4월 방일 직후 방한설이 있다가 지난 8월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원 위원이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부산에서 만나 11월 방한설이 구체화했다. 그러나 올해가 사실상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 주석의 연내 방한은 물건너 간 것으로 보는 게 맞다. 그럼에도 이번엔 양제츠 위원보다 낮은 서열의 왕이 외교부장이 다시 방한해 시진핑 주석의 방한 문제를 두고 군불을 지피는 흐름이다.
[이재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