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미국.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청년 '벤 코헨'과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청년 '제리 그린필드'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실패자였다. 벤 코헨은 대학을 중퇴했고, 제리 그린필드는 의대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 '뭘 할까?' 고민하던 두 사람 앞에 지역 전문대학교에서 하는 아이스크림 제조 강의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강의를 들을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한 사람만 등록하고, 내용을 노트해서 서로 공유했다.
벤 코헨은 지난 17일 실리콘밸리 지역에 위치한 케플러재단 초청 강연에 등장해 "성적은 좋았다"며 "오픈 북 테스트 였기 때문에"라며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국 버몬트 주에 위치한 벌링턴이라는 동네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한다. 우리나라 편의점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미국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 '벤&제리스'의 시작이었다.
아이스크림이 잘 팔리면서 회사가 점점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벤 코헨은 회사가 커질수록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맨이 아니라 비즈니스 맨이 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고용하고 해고하고, 싸움이 생기면 변호사를 부르는 과정에서 그는 "경제라는 기계 톱니바퀴 속에서 원래 사람들을 위해 좋은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던 생각이 찌그러 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회사를 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식당에 들어가 식당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벤 코헨이 '회사를 팔아야 겠다'고 하자, 식당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오늘날 비즈니스에는 문제가 많네요. 회사를 팔지 말고 당신이 그 비즈니스의 문제를 해결해 보면 어때요?"
그렇게 오늘날 벤&제리스는 미국 내에서도 손 꼽히는 사회적 기업 중 하나가 됐다. 특히 올해 여름 있었던 흑인들의 사회적 운동 '블랙라이브스매터(Black Lives Matter)'를 회사 차원에서 지지 선언을 하고 관련 제품들을 내놓으면서 화제가 됐다. 인종차별적 발언을 검열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던 페이스북을 상대로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불매운동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제품을 애용하는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렸다. 노골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수백만명에 달하는 골수 트럼프 지지자들이 벤&제리스 아이스크림에 대해 가질 반감은 고려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벤 코헨 창업자는 "우리의 판단은 정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리가 보는 현실은 트럼프가 정의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따를 뿐이다"라고 했다. 청중 중 한 명이 "하지만 이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벤 코헨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이견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견이 없는 사항이라면 자신의 입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견이 있기 때문에 입장이 중요한 것이다."
목소리 높이면 손해? 그 틀을 깨는 기업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창업자
통상적인 기업들은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여서 볼 손해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상업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는게 비즈니스 업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공식들을 깨는 기업들이 최근 미국에서 다수 관찰되고 있다. 벤&제리스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IT 회사 세일즈포스 역시 그런 회사 중 하나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창업자는 오라클에서 잘나가던 임원으로 있던 시절,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휴직을 떠났다가 회사를 창업한 케이스다. 세일즈포스를 만들면서 가장 역점을 뒀던 것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였다.마크 베니오프는 저서 '트레일블레이저'를 통해 세일즈포스 직원들이 모두 지역사회와 공동체 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개척자들이 되면 좋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마크 베니오프 CEO는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검열하지 않았을 때 두 회사를 상대로 공개적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칼라일그룹 회장이 진행하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 출연해 "사회적 신뢰가 우선이지 기업의 이익이 우선은 아니다"라며 "그런 점에서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직무를 유기했다"고 비판했다.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의류브랜드 '파타고니아'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캘리포니아 소재 비누제조 회사 '닥터 브로너'도 친환경 소재만 사용하는 동시에 지구온난화, 유전자변형식품 같은 문제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 공정한 음식 이니셔티브(EFI)의 르앤 류자멘티 디렉터는 현지에서 열린 한 이벤트에서 "소비자들은 점점 기업들이 나서서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길 원하고 있다"며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그런 경향은 두드러 지고 있다"고 말했다.엠마누엘 하일브로너, 닥터브로너스 창업자
실리콘밸리를 만든 페이잇포워드 문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낼까? 아니면 더 적은 돈을 낼까?"
201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대학교 UC버클리와 UC샌디에고의 심리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금했다. 네 명의 연구자들은 실험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인도식당 '카르마키친'이라는 곳을 찾아 계산서에 이런 문구를 써 놨다.
"앞에 오셨던 손님이 당신의 식사 비용을 대신 내주셨어요. 당신을 위한 선물이래요. 당신은 그냥 나가셔도 돼요. 하지만 당신 역시 당신 다음에 올 손님을 위해 식사비용을 내 주실 수 있어요. 이 봉투에 익명으로 돈을 기부해 주시면 돼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이 자신이 먹은 밥값보다 더 많은 금액의 돈을 봉투에 담은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식당에서는 돈을 내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위해서보다 더 큰 금액을 낸 것이다. 네 사람의 연구결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지불할 때 당신은 더 많은 돈을 낸다' (Pay More When You Pay It Forward)라는 논문으로 발표됐다.
오늘날 실리콘밸리를 지배하는 '페이잇포워드' 문화는 이 논문 한편으로 잘 요약된다. '페이잇 포워드'는 성공한 창업자들이 새로운 창업자들을 지원해 주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실리콘밸리의 독특한 문화를 일컫는다. 스타트업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돈, 기술 등을 '포워드'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들이 성공하면 또 다시 이 지역사회에 자신들의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포워드'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지원이 더 큰 지역사회의 발전을 낳는다. 실리콘밸리가 빚어내는 상승작용이다.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기쁨을 느끼는 직원들
아담 그랜트 와튼스쿨 교수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스타트업 뿐만 아니라 애플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대형 IT 기업들도 이런 '페이잇포워드' 문화를 내부 직원 운영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담 그랜트 펜실배니아 대학교 와튼스쿨 교수는 최근 실리콘밸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라인에서 개최한 이벤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거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이 일하고 있다"며 "하지만 회사가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면서 세상을 진전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고 말했다.그랜트 교수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재단을 만든 미국 대형 유통회사 사례를 들었다. 그랜트 교수는 그 회사가 재단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직원들이 재단을 통해 복지혜택을 받는 것보다, 직원들이 복지재단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직원들에게는 더 큰 힘이 됐다는 점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건 일종의 자존심이며 자긍심 문제"라고 덧붙였다. UC버클리와 UC샌디에고의 심리학자들도 논문을 통해 "사람들은 친절을 받았을 때 지갑을 크게 연다"며 "특히 그 친절이 구체적인 물질로 나타나기 보다는 추상적인 감정으로 다가갔을 때 그 효과는 훨씬 크다"고 밝혔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뛰어난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타인과 사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포워딩'하면서 얻는 자긍심 덕분일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 = 신현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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