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한방병원은 한의 군의관으로서 대전자령 전투 등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신홍균 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고 17일 밝혔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신홍균 선생은 한의사로서 가업을 이어가다 중국 만주로 이주해 1920년 5월 독립운동가 김중건과 함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듬해 김중건이 일본군에 체포되자 1925년까지 대진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이후 1933년 한국독립군에 합류,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를 포함해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에서 한의 군의관으로서 활약하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신홍균 선생의 서훈 추서는 이날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진행된 독립유공자 128명에 대한 포상과 함께 이뤄졌으며, 자생한방병원 설립자인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이 신홍균 선생의 후손으로서 서훈을 전수받았다.
잊혀졌던 신홍균 선생의 공적은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과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다시금 조명받을 수 있었다. 가문의 독립운동사를 기리기 위해 3년간 국내외를 오가며 사료(史料) 발굴에 힘쓴 결과다.
지난해 2월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오른쪽)이 독립유공자유족회 김삼열 회장에게 독립유공자·후손 의료지원을 위한 기금을 전달하는 모습.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수많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을 모두 기억하기란 쉽지 않지만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일이 후대에 남은 우리들의 책무라 생각한다"며 "자생의료재단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예우하는 사회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한편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은 독립운동가 및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 지원사업 전개에 힘쓰고 있다. 지난해 자생의료재단은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원·자생한의원과 협력해 독립유공자 및 후손 100명의 척추·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지원을 실시했으며,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이 독립유공자유족회에 기탁한 1억원이 독립유공자 후손·유가족의 생계지원금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자생의료재단은 국가보훈처와 함께 독립유공자 자녀·손자녀 고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신홍균 선생(1881.8.20~미상)은 가업인 한의업을 이어가다 1911년 독립운동에 투신해 소유하던 토지를 종손에게 전부 위탁하고 중국 봉천성 장백현 17도구로 떠나 그곳에서 의술을 펼쳤다.
신홍균 선생은 김중건(원종교·대진단을 만든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가)을 비롯한 200여명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한데 이어 그 이듬해인 1921년 김중건 단장이 군자금모집 도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자 신홍균 선생은 김중건이 복귀하는 1925년까지 대진단 단장으로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다.
1933년 3월 한국독립군 지청천 장군이 김중건에게 연합 제의를 보내자, 김중건은 신홍균 선생을 포함한 정예병력 50여명을 파견한다. 신홍균 선생은 한국독립군에 합류해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다. 이후 일본군이 연길현 방면으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한국독립군은 1933년 6월 28일 중국 길림구국군과 연합해 적의 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령 서쪽 계곡에 매복했으나 폭우가 내려 추위와 굶주림에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때 신홍균 선생이 주변에서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뜯어와 병사들에게 먹여 사기를 회복시켰다. 당시 전투에 함께 했던 백강 조경한(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무위원)은 훗날 회고록 '대전자대첩'에서 승리 주역으로서 신홍균 선생에 대한 글을 남긴다. 3일 후 일본군 본대가 대전자령에 다다르자 한중 연합군은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궤멸돼 흩어졌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1933년 10월 한국독립군은 지속적으로 의견 충돌을 겪던 중국 의용군 및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해 각자 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한국독립군은 동녕과 영안현 등 산악지대를 돌며 유격작전을 펼쳤으며, 신홍균 선생은 후일을 기약하며 병사들을 인솔해 밀산 지역으로 이동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로서 그의 유지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중이다. 신홍균 선생의 의지를 받든 이들 중에는 비슷한 시기 독립운동가·한의사로서 활동하다 1930년 '제3차 간공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조카 신현표 선생과 그의 아들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명예이사장도 포함됐다. 신준식 명예이사장에게 이어진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의 신념은 자생한방병원 설립가치의 근간으로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이병문 의료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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