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사진)이 지난달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을 회고하며 숙명여대에 100억원을 기부했던 사연을 뒤늦게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전 총장은 이건희 회장 발인이 있었던 지난달 28일 이같은 사연을 담은 추모의 글을 작성,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장윤금 숙명여대 총장을 비롯한 일부 대학 관계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 전 총장의 추모글이 재계에도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면서 여성 인재 육성에 적극적이었던 고인의 면모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이 전 총장은 "이건희 회장님 발인을 지켜보며 그 분과 숙명여대와의 인연에 대해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숙명 가족들 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글을 시작했다.
이 전 총장은 "2006년 숙대 창학 100주년을 앞두고 백주년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던 당시 천신만고 끝에 땅은 구했지만 150억원에 달하는 건립비용 마련이 막막했다"며 "고민 끝에 이 회장 면담을 신청했는데, 면담 요청을 수락하신 것은 물론이고 놀랍게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저녁식사 때 이 회장은 '만나기로 약속한 뒤 일주일동안 틈날 때 마다 이 총장과 숙대를 위해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했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며 "50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가 숙대를 위해 일주일 내내 고민하셨다는 말씀이 너무 고맙게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이 전 총장은 "이 회장은 일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업이나 대학이 초일류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인재 양성의 목표가 있다고 하셨다. 그러자 제가 '여성 인재양성을 위한 비전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재정확보에 어려움이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니 저녁식사에 함께 참석했던 이학수 부회장에게 '숙대 여성 인재 양성을 위해 재정 지원을 해주세요'라고 하셨다"며 "그 후 삼성은 숙대 백주년 기념관 건립비용으로 100억원을 기부해 주셨고 백주년 기념관 2층에는 삼성 컨벤션 센터가 여성인재양성의 산실로 영원히 자리 매김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저녁식사 전에 차를 마시면서 '한달에 책을 20권 읽으신다는데 사실인가요'라고 묻자 '새 책을 사면 목차부터 보는데 아는 내용은 건너 뛰고 새로운 것만 추려 읽다 보니 20권 정도 읽게 되더군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회사 임직원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신지 묻자 '삼성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어요'라고 답하셨다"라며 당시 나눴던 대화도 공개했다.
이 전 총장은 4일 매일경제와의 전화통화에서 "삼성이 백주년 기념관 건립에 100억원을 지원했는데 이것이 이 회장의 배려와 결단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그동안은 혹시나 이 회장께 누가 될까봐 밝히지 않았지만, 이것도 학교 역사 중 일부인만큼 적어도 숙명인들은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장과 이 회장의 인연은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 총장은 2001년부터 시작된 삼성생명 여성 비추미 대상 선발위원장을 맡았고, 이듬해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이 출범하자 초대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전 총장은 이 회장에 대해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깊었다. 여성 인재들의 재능을 키워야 한다는 소신도 강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년에 적어도 몇명씩은 20년, 30년 후 숙대 총장을 할 만한 인재들을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며 "한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가려면 리더를 제대로 키워야 하며 장기적으로 투자해 능력 뿐 아니라 성품까지 갖추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인은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였다. 세상과 인생에 대해 성찰을 깊게 했고 단 둘이서 대화를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고 가장 좋은 답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며 "'나라가 잘 돼야 기업이 잘 된다. 기업은 국가발전에 보탬이 되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었고 그 중심에 인재 양성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업, 공공기관 등이 그런 마음을 갖고 일한다면 대한민국은 초일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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