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레이더P] WTO 사무총장 `희망고문`
입력 2020-10-28 16:43 
WTO 사무총장 최종후보자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왼쪽)과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후보자(오른쪽) [사진 = 연합뉴스]

"최종 후보에 포함됐다는 것 자체가 큰 승리였다"
2012년 4월, 나이지리아의 재무장관을 맡고 있던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박사는 세계은행 총재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언론에 나와 이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아프리카 국적인 자신이 최종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는 뜻이다. 세계은행 총재 자리는 미국 이외의 국적자에게 돌아간 적이 한번도 없다. 세계은행이 국제기구이긴 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과반수가 넘는 지분을 보유한 특이한 지배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 오콘조-이웰라 박사가 이 전통을 깨고 경선에 출마했고, 그 열기는 대단했다. 오콘조-이웰라 박사가 25년간 세계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하면서 조직에 기여한 것을 감안하면 세계은행 총재 자리에 적임이라는 세계 전현직 관료들의 청원까지 등장했다. 유례없는 글로벌 지지에 힘입어 그녀는 TV토론까지 제안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이변없이 미국인에게 돌아갔다. 그가 바로 '최초의 한국계 세계은행 수장'으로 보도됐던 김용 총재다.
◆ 트위터·스탠다드차타드은행 이사에 국제기구 이사·고문 약력만 십여개
2020년 10월, 오콘조-이웰라 박사는 또다른 한국인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맞붙었다. 이번엔 세계무역질서를 관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자리다. 8년새 그녀의 이력서는 더욱 길어졌다. 나이지리아 외교부 장관, 경제부장관, 재무부 장관까지 마친 그녀는 나이지리아를 떠나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뛰기 시작했다.
2014년 이후 그녀에게 새로 생긴 명함만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국제자문단, 세계보건기구(WHO) 산하의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이사회 의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유엔개발기구(UNDP) 세무조사 이사회 위원, 국제통화기금(IMF) 국제통화금융위원회 위원, 세계은행-IMF 개발위원회 의장 등. 여기까지가 국제기구 활동이라면 민간기구·기업 활동은 더 많다.

2018년부터 트위터 이사회 멤버로 들어간 그녀는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사외이사, 라자드 선임고문, 록펠러재단 글로벌개발네트워크 이사, 옥스퍼드대 마틴스쿨 자문위원 등 학계와 금융회사, IT기업까지 골고루 섭렵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 유럽연합(EU)의 고위 관료들과도 특히 가까웠던 그녀는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가 이끄는 UN 글로벌 교육재정위원회의 일원이면서 세계경제포럼(WEF) 영글로벌리더스재단 회원으로써 글로벌 정상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 나이지리아·미국 이중국적자 오콘조-이웰라 박사
여기에 하나 더, 이번에 그녀가 새로 꺼내든 카드는 미국 여권이다. 지난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나이지리아와 미국 이중국적자가 됐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오콘조-이웰라 박사는 19살이었던 197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세계은행에 근무하면서 25년을 매릴랜드 포토맥에 살았다. 그사이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고, 네아이를 모두 하버드대에 보내 그중 셋을 의사로 키웠다.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터잡고 살면서도 나이지리아 국적을 고수했던 그녀가 지난해 결국 이중국적자가 됐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리면서 WTO 사무총장 선거를 둘러싼 각국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미중무역전쟁 속에 치뤄지는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특히 난처하다. 아프리카와 가까운 중국 관계를 생각하면 중국은 오콘조-이웰라 박사를 지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당초부터 많았다. 하지만 중국판 세계은행이라 불리는 AIIB에 참여할 정도로 중국과 가까웠던 오콘조-이웰라 박사가 막상 미국 이중국적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도 그녀를 지지하기 어려워진 상태가 돼버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WTO 사무총장 선거를 치르고 있는 것 자체가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던 터다. 지난 7월 호베르투 아제베두 전임 WTO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남기고 돌연 사임의사를 밝히자 미국은 앨런 울프 WTO 부총장(미국인)이 임시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잔여임기를 채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중국이 비토권을 행사했다. 그덕분에 예정에 없던 차기 사무총장 선거가 올 가을 치뤄지게 된 것이다.
미국도 두 후보중 누구를 지지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달초 서훈 국가안보실장·최종건 외교부차관 등 고위급 인사들이 차례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들이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의 지지를 요청하자 국내에서는 미국의 지지가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덩달아 커졌다. 하지만 오콘조-이웰라 박사가 미국 시민권을 꺼내들면서 미국도 막상 자국민을 저버리고 한국인을 선택하기 난처한 상황이 돼버렸다.
◆ 희망고문 대신 박수를 준비할 때
국제기구 수장이 되기 위해선 개인의 역량이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의 역량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수다. 문재인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에게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의 지지를 부탁하며 전화 외교를 펼치고, 외교부 장차관 등 고위급 인사들이 외교력을 총동원해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때문이다. 상대 후보에 비하면 국제무대에서 지명도가 떨어지는 유명희 후보에게는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었다. 하지만 온나라가 그녀를 응원했고 최종 라운드까지 올라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좋게 잘 싸운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 정부의 '희망고문'이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민들에겐 밝은 부분만 보여줬다. 정부는 막강한 상대 후보에 대해 우리 국민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WTO 수장에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기대만 부풀렸다. 외교부와 산업부 등 각 부처가 수차례 브리핑을 하면서도 오콘조-이웰라 박사를 '아프리카 후보'라고만 칭했을 뿐, 그녀의 국적·경력·이력에 대해서는 소상히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과 장차관들이 어느 나라 정상들과 통화했다는 내용만 연일 반복해 알렸을 뿐이다. 여기에 일부 언론에서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국수주의 시각까지 더해졌다. 일본 정부가 유명희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각국에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까지 등장했다. 체급이 다른 상대방 후보에 대한 상세 분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WTO 사무총장 선거는 득표수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참여국들의 중지를 모아서 결정하는 컨센서스 방식이다. 유명희 본부장 대신 오콘조-이웰라 박사가 WTO를 이끌게 되더라도 우리는 WTO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국제 무역질서의 파수꾼 WTO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이 가장 먼저 확보해야할 우군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WTO 사무총장에 어떤 후보가 되더라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써 박수를 보낼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글로벌 시민이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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