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단독] 정약용 유배지에서 나라 앞날 걱정한 김동연
입력 2020-10-28 06:00  | 수정 2020-10-28 07:33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인 `사의재` 대청마루에 앉아 경세유표 내용을 언급하며 나라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정혁훈 기자]

"다산 선생과 국가의 앞날을 생각합니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7일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 중 한 곳인 사의재(四宜齋)를 찾아 방문록에 이처럼 적었다. 김 전 부총리의 향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정치 참여 가능성에 대한 거듭된 질문에 대해 이날도 김 전 부총리는 "앞서가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김 전 부총리가 이날 방문한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됐을 때 4년간 기거한 주막이다. 다산은 사의재를 시작으로 다산초당 등 강진에서만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역작을 집필했다. 김 전 부총리는 이날 사의재 대청마루에 앉아 자신이 설립한 사단법인 유쾌한반란 관계자들과 함께 다산의 뜻을 기렸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 중 한 곳인 사의재를 방문해 옛 주막을 재연해 놓은 동문매반가에서 "국가의 앞날을 생각한다"는 방문록을 남겼다. [정혁훈 기자]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충신지사가 어찌 이를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겠는가." 김 전 부총리는 "다산 선생이 경세유표 서문에 이 말을 적었던 20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며 "그가 경세유표를 저술하면서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김 전 부총리는 이어 "(위정자들이) 다산의 말을 귀담아 듣고 행동에 옮겼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지만 결국 그 이후 70여년이 지나 조선이 쓰러졌다"며 "나라가 (지금처럼) 시끄러울 때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좌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가지 구조적인 문제들을 고쳐 나가야 하는 시점인데, 서로 싸우고 나라가 쪼개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김 전 부총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옛 사의재를 재연한 바로 옆 주막 주인이 기념글을 남겨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이에 흔쾌히 응하면서 적은 글이 바로 국가 앞날을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주막 안의 다른 손님이 이 글귀를 보고는 "김 전 부총리가 아무래도 정계에 진출하려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현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리를 먼저 일어선 김 전 부총리는 동행자들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지금은 누가 뭐 할지를 따질 때가 아니다. 다 같이 각성하고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되받았다. 정계 진출 여부에 대한 세간의 관심에 대해 재차 확인을 요청하는 기자의 물음에도 김 전 부총리는 "앞서가지 말라"고 답했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왼쪽 네번째)가 강선아 우리원 대표(다섯번째) 등 청년 농부들과 함께 추수 체험을 한 뒤 누렇게 익은 벼를 배경으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정혁훈 기자]
김 전 부총리의 이번 강진 방문은 1박2일간 이어진 농어촌 탐방의 일환이었다. 지난 26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거쳐 순천시와 강진군으로 이어진 빡빡한 일정이었다.
첫날 보성군 벌교읍에서는 벼농사 추수 체험을 했다. 우리나라 유기농 벼농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고(故) 강대인 농부 가족들이 일구고 있는 우리원 농장에서였다. 김 전 부총리는 지난 5월 말에 이 곳을 찾아 모내기 체험을 했었다. 이날 벼베기는 당시 고 강대인 농부 딸인 강선아 우리원 대표가 "추수할 때도 꼭 와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김 전 부총리는 누렇게 익은 벼를 낫으로도 베고, 콤바인도 직접 몰았다. 이어 청년농업인연합회(청연)에서 활동하는 청년 농부들과 간담회의 시간도 가졌다.
김 전 부총리는 이날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들고 온 청년 농부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으며 격려했다. 경북 영주 사과와 전남 무안 도라지배즙, 전남 장성 새싹삼 등이었다. 청년들은 김 전 부총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한 홍보에 활용하기로 했다.
김동연 전 부총리가 전남 여수 안포리를 찾아 현지 어민들과 함께 전어잡이 체험을 하고 있다. [정혁훈 기자]
김 전 부총리는 곧바로 여수 안포마을로 이동했다. 100여 어민으로 구성된 작은 어촌마을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홍합 패각 처리의 어려움을 비롯해 고령화와 독거노인, 어촌 후계인력 부족 등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김 전 부총리에게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 전 부총리는 어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공감하면서 "향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김 전 부총리는 밤 9시가 넘어 작은 배를 타고 전어잡이에도 나섰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작업 끝에 김 전 부총리는 온몸이 땀과 바닷물로 범벅이 됐지만 표정은 밝았다. 이희안 어촌계장이 "환경 오염이 심해져 전어잡이가 옛날 같지 않다"고 말했지만 이날 만큼은 그물에서 기대 이상의 전어를 건져 올린 덕분이었다. 적어도 이날 김 전 부총리는 벼베기와 고기잡이를 하면서 농부와 어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수확할 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 같았다.
강진에서는 전남생명과학고(옛 강진농고) 학생·선생님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이 학교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졸업한 학교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김 전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학창 시절 겪었던 어려움과 해외 유학 시절 닥쳤던 삶의 회의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소개하면서 이 곳 학생들도 '유쾌한 반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학교를 나온 한 젊은 교사는 김 전 부총리에게 요청에 가까운 부탁을 해 눈길을 끌었다. "김 전 부총리님은 상고 졸업을 앞두고 은행에 미리 취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생명과학고를 비롯한 특성화고 학생들은 갈수록 취업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농업 관련 기관이나 기업의 농업계 고교 졸업생 채용 실적이 형편 없습니다. 농업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우리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공부할 수 있도록 취업 여건을 개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전 부총리는 "선생님의 의견을 명심하겠다"며 "특성화고 학생들의 취업 여건이 좋아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화답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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