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단독] 제일은행 매각 `1998년 10월~1999년 9월` 어떤 일이 있었나
입력 2020-10-07 15:09  | 수정 2020-10-08 15:36
1999년 12월 23일 뉴브리지캐피탈 파트너 웨이지안 샨(사진 왼쪽부터)과 예금보험공사 팽동준 이사, 유시열 행장이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매경DB]

[들어가는글] 1999년 12월 제일은행의 국외 매각은 한국현대 경제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인 외환위기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그로부터 한국금융은 외국계 자본의 먹잇감이라는 인식이 심어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한국금융의 선진화에 대한 의지가 본격적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21년간 한국은 당시 제일은행 매각을 담당했던 정부 관료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으나, 제일은행을 인수했던 사모펀드가 어떤 내부사정을 갖고 제일은행을 인수했는지 들은 적은 없다. 어쩌면 정말 중요할 수 있는 역사의 퍼즐 한 조각. 매일경제신문은 1998년~2004년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사모펀드였던 뉴브리지캐피탈이 어떤 생각과 협상태도로 제일은행을 인수했는지에 대한 풀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뉴브지리캐피탈에서 제일은행 인수 실무를 담당했던 웨이지안 샨 파트너(현 PAG 캐피탈 회장)는 조만간 펴낼 책 '머니게임즈'와 매일경제 인터뷰를 통해 당시 스토리를 재구성했다. 제일은행에 관련된 이들과 향후 사모펀드 투자를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현대경제사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
"누가 실패한 나라의 실패한 은행을 사겠는가?" 1998년 4월 모건스탠리를 통해 제일은행의 매각 소식을 들은 웨이지안 샨(뉴브리지캐피탈 파트너)의 심경이었다. 그러나 당대 최고 규모의 사모펀드 TPG를 운용하고 있던 그의 보스 데이빗 본더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샨에게 이렇게 팩스를 보낸다. "지금보다 강력한 정부의 보호조치가 있어야만 한다는 네 생각은 옳다. 하지만 부실은행을 바닥에서 살 수만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점은 인생의 교훈이다. 계속 상황을 살펴라."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해외 첫 매각사례였던 제일은행 뉴브리지 딜은 이렇게 시작됐다.
뉴브리지의 제일은행 인수 야전사령관이었던 웨이지안 샨은 1998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이후 2004년 스탠다드차터드에 매각하기 까지 전말을 조만간 출간할 책 '머니게임: 미국의 딜메이커들은 어떻게 한국의 상징적인 은행을 구출했나'에 상세하게 기술했다. 제일은행의 1999년 매각은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해외매각 첫 사례였고, 이후 한미은행(MBK가 인수한 뒤 씨티은행에 매각) 외환은행(론스타에 인수)의 해외매각에 물꼬를 텄던 역사적 딜이다. 매일경제신문은 단독으로 이 책을 사전 제공받아 정부관료들도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에 그를 요약해 본다.
본 계약 3일 전에 소프트뱅크 참여
제일은행의 부실 도화선이 됐던 한보철강의 부도사태가 실린 1997년 1월 24일 매일경제신문. [매경DB]
1998년 10월 9일 본더만과 샨은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헌재 장관은 물었다. "제일은행은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이었다. 이곳을 인수할 자금이 뉴브리지에 있는가?" 샨은 답했다.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샨의 책에 따르면 당시 뉴브리지는 1호 펀드를 소진한 상황이었고, 2호 펀드는 모집 중이었다. 뉴브리지와 정부는 1998년 12월 31일 MOU를 체결했고, 1999년 9월 17일에는 투자약정서를 체결했는데 이 때까지 뉴브리지는 인수자금 5000억원을 투자할 투자자(LP)들을 확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본계약 체결이 1999년 12월 23일이었는데, 1999년 12월 20일에 샨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을 만나 제일은행 투자를 제안했다. 뉴브리지의 모회사였던 대형 사모펀드 TPG는 알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제일은행에 투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샨은 회고했다.
"만일 이런 사실을 한국 정부가 알았다면 딜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 같다. 동의하는가"라는 매일경제의 질문에 샨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뉴브리지와 TPG는 전 세계 연기금 및 기관투자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투자할 만한 딜이 있다고 하면 얼마든 자금을 모집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모펀드들은 딜 구조가 완성될 경우 자신들의 명성과 트랙레코드를 이용해 투자자들을 모집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의 말대로 뉴브리지는 2000년 1월 중순 제일은행 인수자금 5000억원을 납입한다.
소프트뱅크만 유일하게 돈을 벌지 못했다
외환위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은행 구조조정 등에 대한 상황을 논의했다. 사진은 2000년 일본에서 다시 만난 두 정상. [매경DB]
뉴브리지는 제일은행을 1999년 12월 23일 인수하고 2004년 12월 24일 영국의 스탠다드차터드 은행에 매각한다. 오늘날 SC제일은행의 탄생이다. 뉴브리지의 투입금액은 5000억원이었으나 회수자금은 1조 6795억원으로 차익은 약 1조 1800억원이었다. 사모펀드들은 통상 20%의 성과보상(Carried Interest)과 총 운용자산의 2%의 연간 운용보수를 가져가기 때문에 최소 2450억원 정도를 뉴브리지 펀드 자체가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금액들은 메트라이프, GE캐피탈, 뱅크오브아메리카 등과 같은 기관투자자들과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연기금들이 투자자(LP)로서 가져갔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당시 뉴브리지의 제일은행 인수 딜을 위해 가장 많은 자금을 LP로서 투자했던 소프트뱅크가 유일하게 손실을 봤다는 점이다. 샨에 따르면 손정의 회장은 1999년 12월 20일 그를 만난 자리에서 제일은행 지분 30% 이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1500억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한 것이다. 손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에게 투자를 요청했다는 점, 자신이 한국인 혈통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소프트뱅크를 통해 제일은행을 인터넷 은행으로 탈바꿈 시키겠다는 비전 등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당시 뉴브리지는 제일은행 지분 51%를 취득했기 때문에 30% 이상을 가져간 소프트뱅크가 사실상 뉴브리지의 가장 큰 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프트뱅크는 2년 뒤 어려워 지면서 제일은행 지분을 다른 사모펀드에 취득가격보다 싼 값에 매각하고 빠져나온다. 손실금액은 수백억원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헌재-현홍주-뉴브리지 3자의 딜
샨은 책을 통해 모든 한국관료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1998년 12월 31일 MOU 체결 이후부터 1999년 9월 17일 투자약정서가 체결되기 까지 제일은행 딜을 담당했던 한국관료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적대적이었고 자신들이 볼 때는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언론플레이를 통해 뉴브리지를 압박했다는 것이다. 샨은 실명을 쓰지 않았지만 당시 한국 금감위에서 제일은행 매각을 담당했던 이는 남상덕 심의관이었다.

샨의 책에 따르면 남 심의관은 뉴브리지를 극한까지 몰아부쳤다. 3월 2일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뉴브리지의 향후 시나리오까지 모두 보여줬을 정도. 그의 책에는 이 기간 동안 총 33차례 정부와 뉴브리지 사이에서 공방이 오갔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남 심의관은 제일은행 자산가치를 장부가에서 1원도 훼손시키지 않고 제값에 매입하라는 제안을 한다거나, 뉴브리지가 지분 51%를 갖더라도 경영권은 정부가 갖겠다는 제안도 했었다고 샨은 회고했다. 또 제일은행의 자본금 대비 순이익 비율(ROE)을 25%로 제한하는 조항을 주장하는 등 뉴브리지의 이익을 제한하려는 제안을 했었다는게 샨의 주장이다.
정부 실무진과 뉴브리지 사이의 커다란 갭을 중간에서 메워준 것은 현홍주 당시 김앤장 고문(전 주미대사)였다. 샨은 6월 9일 남 심의관을 포함한 정부 실무진을 비판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현홍주 대사가 전화가 와서 이헌재 장관이 자신과 직접 이야기하라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1999년 7월 뉴브리지는 남 심의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양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7월 부터 9월까지 정부에서는 남 심의관이 배제됐다. 이헌재 장관이 현 대사를 통해 뉴브리지와 직접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샨은 현 대사가 없었다면 딜은 이뤄질 수 없었다고 했다. 현홍주 대사는 2017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뉴브리지의 소송 검토
1999년 제일은행 인수를 담당했던 뉴브리지캐피탈 파트너 웨이지안 샨 (현 PAG캐피탈 회장)이 매일경제와 화상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 신현규 특파원]
하지만 이헌재 장관 역시 지속적으로 정부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들이밀었다. 예를 들어 뉴브리지가 지분을 팔 때 정부 지분까지 함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드래그 얼롱)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고 (8월 25일) 정부의 공적자금을 뉴브리지에 불리한 조건(현금)으로 주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9월 3일) 협상을 해 가면서도 이 장관은 투자약정서의 법적 구속력을 없애서 소송의 위험을 없애려 했다. 이후 이 장관은 투자약정서의 대부분에 합의를 했지만 불과 이틀만인 9월 9일에는 또 이를 번복하고 투자약정서의 구속력을 없애려 했다.
이 때 뉴브리지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이미 남 심의관의 모습을 보고 샨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검토하기 시작했었다. 뉴브리지의 수장인 데이빗 본더만은 9월 1일 한국의 대한생명을 상대로 매각 중단에 대한 배상책임을 물어 승소한 파나콤 측을 변호한 로펌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상 소송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9월 15일 샨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최후 제안을 던지고 홍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샨에 따르면 현 대사가 뉴브리지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고, 사실상 최후통첩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이헌재 장관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제서야 양측이 합의를 이루고 9월 17일 제일은행 투자약정서가 체결됐다.
후일 이헌재 장관은 1999년 여름에 대해 "나는 진짜 끝장 토론을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샨의 책 역시 1999년 1월~9월 사이 벌어진 33차례의 공방전이 가장 두꺼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박병무 변호사를 상대에게 빌려주다
투자약정서 체결 이후 본계약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박병무 김앤장 변호사(당시 뉴브리지 자문)를 뉴브리지 측에서 예금보험공사 측에 빌려준 일화다. 본계약 조건에 대한 합의들이 어느 정도 끝나고 변호사들끼리 세부조항에 대한 합의를 하고 있는데 상대 측인 예보 측에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뉴브리지 측에서는 김앤장과 클리어리(Cleary)라는 로펌에서 7명의 변호사들을 쓰고 있었는데, 한국 예보는 화이트&체이스와 광장에서 3명의 변호사만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샨은 "우리 변호사들은 돌아가며 잠을 잤지만, 상대 변호사들은 잠도 자지 않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게다가 화이트&체이스의 변호사 에릭 윤은 신혼 상태였다고. 그래서 1999년 12월 21일 당시 뉴브리지를 자문하고 있던 박병무 김앤장 변호사가 예보 측으로 투입돼 서류검토를 진행했다는 것이 샨의 기억이다. 6대 4의 게임이었지만 박 변호사가 투입되면서 가까스로 12월 23일 모든 서류 검토가 끝났고, 그날 오전 11시 본계약이 체결됐다.
제일은행 인수 당시 실력을 발휘했던 박 변호사는 뉴브리지캐피탈의 한국 대표를 역임하고 뉴브리지가 인수한 하나로텔레콤의 대표를 지냈다.
모두가 SC보다 HSBC를 선호했었다
2004년 제일은행 매각 당시 정부 측(예금보험공사)과 뉴브리지 펀드 내부에서도 SC보다 HSBC가 더 나은 후보였다는 사실이 이번에 밝혀졌다. 하마터면 SC제일은행이 아니라 HSBC제일은행이 됐을 뻔 했다는 얘기다. 2004년 제일은행이 HSBC에 매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국내에도 많이 보도되어 알려져 있다. HSBC의 회장이었던 존 본드는 1998년 서울은행을 비롯해 외환은행 등 지속적으로 한국의 은행업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본드 대표는 뉴브리지의 공동대표였던 딕 블룸과 친한 관계였고, 보유현금 또한 제일은행 매집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반면 SC에는 그만한 현금이 없었다.
그러나 적극성이 둘의 운명을 갈랐다. 샨에 따르면 2004년 12월 24일 SC는 기존보다 1000억원을 더 높인 3조 4000억원의 인수가격을 제시했다. HSBC는 원화가 아닌 달러화로 30억 7500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3조 1000억원)를 써냈다. 원화가치가 상승하고 있던 터라 원화로 가격을 써낸 SC가 일단 유리했고, HSBC는 내부 관료주의 때문에 의사결정이 빠르지 못했다고 샨은 회고했다.
공적자금 투입? 샨이 보는 딜의 실체는
제일은행에는 결국 국민들이 갚아야 했던 공적자금 17조 8000억원이 들어갔다. 그 중 12조원 가량이 회수됐고 5조 3000억원 정도가 회수되지 못한채 남았다. 외환위기로 인한 상처 때문에 화가 난 여론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1조 1800억원의 이익을 가져간 뉴브리지와 이헌재 전 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후보였다. 웨이지안 샨은 책을 통해 이렇게 항변했다.
"언론들은 정부가 투입한 수조원의 공적자금과 우리가 투자한 5000억원이라는 돈의 크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비교였다. 우리는 마치 1000억원 짜리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려서 난리가 난 대형마트를 인수하는 것과 같았다. 그 창고는 보험금을 통해 1000억원을 메우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형마트의 본질적 가치는 보험회사가 지급해 주는 보상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본 기사는 '와일리' 출판사에서 조만간 출간되는 책 웨이지안 샨의 책 '머니게임즈'에서 상당부분 발췌되었습니다.
◆ "정부는 우리를 극한까지 밀어부쳤다"
- "펀드 수익모델과 정부실수에 대한 환불까지 제안"
- "이헌재 전 장관 속을 읽은 적 한번도 없어"
- 웨이지안 샨 당시 뉴브리지캐피탈 파트너 인터뷰
뉴브리지캐피탈에서 제일은행 인수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담당했던 웨이지안 샨 씨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자신들을 극한까지 몰아부쳤다고 했다. 그의 책에 따르면 뉴브리지는 정부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까지 검토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브리지 본사에서는 수십억 자금을 보유한 사모펀드 TPG의 데이빗 본더만 회장이 직접 소송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뉴브리지를 압박하면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려 노력했던 한국 관료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인터뷰는 화상 1차례, 이메일 2차례 등을 통해 이뤄졌다.
▶뉴브리지 자문을 맡았던 이들과 정부 관료들 사이의 커넥션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 우리를 자문해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사항들은 우리가 직접 정부 관료들과 협상했다. 정부 관료들은 정말 협상하기 매우 힘들었고, 매우 터프했다.그들이 한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협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협상 전체 과정이 15개월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당신이 1997년 당시 정부 관료였다면 어떻게 협상했을 것 같은가?
-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책을 통해 왜 딜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유를 밝혀 두었다. 그건 신뢰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1999년 3월 2일) 뉴브리지가 예상하는 펀드 수익모델을 정부 관계자들에게 모두 공개해 주었다. 이후 (1999년 11월 20일) 본계약 체결 직전에는 만일 정부 측에서 계약서 작성상 실수를 한다면 전액 환불해 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그만큼 양자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다고 봤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헌재 장관 같은 사람들은 당신을 '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을까?
- 나는 이헌재 장관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장관의 회고록도 번역본으로 읽었다고 했다) 그와의 협상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이 장관은 사려깊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그럼에도 힘든 상대였다. 나 역시 그의 속을 읽은 적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협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 정부는 뉴브리지가 많은 돈을 벌어가길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 맞다. 그래서 딜의 구조를 보여줬다. 우리의 가정 하에서 우리는 그렇게 큰 돈을 벌어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부는 달랐다. 그들은 은행이 더 잘 될거라고 봤지만, 우리는 리스크가 있다고 봤다. 정부는 경제가 더 빨리 회복될 거라고 봤지만, 우리는 불황이 장기화될 거라고 봤다. 양쪽 모두 미래에 대한 전망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뉴브리지 펀드1호는 자금이 없었고, 펀드 2호는 모집 중이었다. 한마디로 5000억원이라는 제일은행 인수자금이 없는 상태에서 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 이헌재 장관이 내게 직접 묻기도 했다. 나는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게 사모펀드가 운영되는 방식이다. 뉴브리지는 당시 메트라이프생명, 뱅크오브아메리카, GE캐피탈 뿐만 아니라 많은 기관투자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모회사인 TPG는 수십억 달러를 갖고 있는 펀드였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 쉽게 자금을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제일은행이 높은 리턴을 보장하는 매력적 매물이었다는 뜻 아닌가?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투자는 늘 위험이 따른다. 1980년대 KKR이 RJR나비스코를 250억 달러에 인수했을 때 그들은 고작 30억 달러를 투자했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15년 동안 이를 팔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돈을 잃었다. 투자는 위험한 비즈니스다. 제일은행이 높은 수익을 돌려줄 수도 있었지만, 손실을 볼 수도 있었다.
▶ 뉴브리지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인식이 있다
- 우리는 은행을 인수한 뒤 인력감축을 하지 않았다. 베인앤컴퍼니가 1000명의 구조조정 계획을 조언했고, 그게 언론에 유출되어 난리가 났지만 나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제일은행 노조와 이야기했고 나의 말을 지켰다. 우리는 대신 은행의 자산을 늘리는 판단을 했다. 은행에 연공서열이 아닌 실력에 따른 성과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여성 채용을 늘렸다. 그 결과 4년 만에 제일은행의 일인당 자산규모는 그야말로 업계 제일이 됐다. 우리는 최고의 위기관리시스템을 도입했다.
▶ 백악관에서 김대중 정부에 제일은행을 매각하라는 압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그는 은행 구조조정에 관심이 많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대화를 통해 자연스레 제일은행 매각 이야기가 나왔을 거라 본다. 특히 뉴브리지가 미국 회사니까 더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 (뉴브리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였던) 나는 데이빗 본더만이 백악관의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알았다 하더라도 내게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당신의 책에는 딜 와중에 스키장, 제주도, 발리 등 호화로운 여행을 한 기록들도 나온다.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한국인들은 이런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나는 매우 단촐하고 검소하며 심플한 삶을 좋아한다. 나는 고비사막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교육을 처음으로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한번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용평과 제주도를 간 것은 크리스마스와 설날휴일을 맞은 여행이었고 그 자리에는 수많은 한국사람들도 같이 있었다. 발리에 간 것은 투자자 컨퍼런스였다. 사모펀드 업계는 세계 최고의 금융기관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매년 투자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열곤 한다.
▶이 책을 쓴 동기는 무엇인가?
- 내가 알기에 사모펀드의 딜을 처음부터 엑싯까지 모든 것을 내부자가 기술한 책은 없었다. KKR의 RJR나비스코 인수 과정을 기록한 '바바리안 앳더 게이트'같은 책들이 있긴 했으나 이는 모두 기자와 같은 외부자들이 쓴 다큐멘터리이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이라는 중요한 나라가 겪은 위기과정에서 관료들과 사모펀드의 협력으로 인해 한 나라의 최고 은행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는 한국 국민들과 투자자 커뮤니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 = 신현규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