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뜻밖의 사고로 기억을 잃은 장 박사(양동근)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어느 초등학교 출신인지 말이다. 이 영화의 팬이라면 필시 저 물음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반복해서 저 질문을 던질 때 폭소 끝에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린 이도 있을지 모른다. '어떤 초등학교를 졸업했느냐' 이것은 이 작품의 핵심이자 후대 한국 코미디 영화 감독들에게 연구 대상이 될 킬링 파트다. 해당 대사를 중심으로 '죽지않는…'을 살펴본다.
먼저 줄거리를 쓱 훑어보자. 하루 21시간 쉬지 않고 활동하는 남편 만길(김성오)이 수상하다고 여긴 새댁 소희(이정현)는 흥신소를 찾는다. 미스터리 연구소라고 이름을 붙인 탐정 사무실의 소장이 바로 닥터 장. 그는 만길이 집 밖에서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음을 의뢰인에게 알린다. 그러나 닥터 장이 놀랍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만길의 여성 편력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경유를 마신다는 것이다. 닥터 장은 만길이 지구를 점령하러 온 외계 종족 언브레이커블임을 밝히고, 그를 처단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닥터 장 자신이 놓은 덫에 여차저차해서 스스로 걸려드는 경위는 영화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이 기사에선 '왜 하필' 기억을 잃은 자가 집착하는 정보가 상대방의 출신 초등학교인지를 들여다본다. 이것이 정말 뜬금포(기대 안 했던 홈런) 대사인 이유는 보통 우리가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서 던지는 질문과 거리가 있어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남과 접점을 찾기 위해 어떤 대학교 또는 고등학교를 다녔는지 묻는다. 통학했던 초등학교까지 묻게 되는 건 통상 다른 여러 질의응답을 거친 뒤다.
충격적 사고 후 기억을 잃고 아이의 지능을 갖게 된 장 박사는 사람들에게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고 다니게 된다. [사진 제공 = TCO]
기억을 상실한 닥터 장이 출신 초등학교를 묻게 되는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해볼 수 있다. 그에겐 사회생활에 대한 아릿한 감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를 파악하는 건 세상에서 살아남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직감하는 것이다. 지독한 악취가 나는 쓰레기장을 지나친 한참 뒤에도 코에 냄새가 맴도는 기분이 들듯, 닥터 장 역시 초등학생의 머리로 돌아갔을지언정 한국에서의 사회생활 요령은 얼얼한 감각으로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 탐정 사무소 같은 허접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그럭저럭 평판을 유지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더욱 더 '관계성'에 대한 천착이 중요했을 테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의뢰인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주기 위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문제는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중학교를 입학할 무렵의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이나마 필사적으로 잡아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느낀다. 누굴 만나든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라고 절박하게 묻는 건 동물적 생존 본능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웃프다. 모든 기억을 잃은 사람이 살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밧줄이 한국에선 겨우 출신 학교 정도란 것이다. 배우 최민식은 김지운 감독 코미디 '조용한 가족'을 본 뒤 "세상살기가 이렇게 힘든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죽지않는…' 역시 인생의 희비극이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정작 영화를 연출한 신정원 감독은 특별히 웃기려는 의도로 만든 대사는 아니라고 하니, 진정 타고난 코미디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신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그러나 '시실리 2km' '차우'로 한국 B급 코미디 저변을 넓혀온 한 작가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고싶은 시네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작품이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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