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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 되겠다"는 약속은 빈말이었나
입력 2020-09-28 09:25  | 수정 2020-10-05 09:37

서해상에서 실종된 공무원 이모씨에 대한 북한군 총격 사망 사건과 관련해 여권의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북한이 바다에서 표류해 기진맥진하던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총을 10여발 쏴서 살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것은 극악무도한 반인륜적인 범죄로,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도 여권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형식적인 사과 입장 표명에 지나칠 정도로 반색하면서도, 정작 국회 차원의 대북규탄결의안 채택에 대해선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북한 통일전선부가 지난 26일 이례적으로 "미안하다"는 김 위원장의 사과가 담긴 한 통의 통지문을 보내자, 여권은 김 위원장에 대해 "통큰 결단" "계몽군주" 라며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인영 통일부장관은 "(북한 최고지도자가) 한 전문에 '미안'을 두 번 사용한 것은 처음"이라고 김 위원장을 비호했고,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가 요청한 지 하루 만에 경위설명, 사과표명, 재발 방지 등이 담긴 답변이 온 것은 발전된 것"이라고 두둔했다.
정세현 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시대와는 좀 다른 면모"라며 "김 원장이 직접 유감 표명을 한 것으로, 그들 말로 '통 큰' 측면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나아가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은 "(신속한 사과는) 우리가 바라던 희소식"이라며 "내 느낌에는 (김 위원장이) 계몽군주 같다"고까지 했다.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지 사흘이 지나서야 사과문 한통을 보낸 북한에 대해 감동하면서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에 대해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대통령은 침묵하고 대통령의 '분신'들이 요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꼬집었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북한은 계몽군주, 남한은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뜻)'이라는 짧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유 이사장의 말을 비꼬았다.
이번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린 여권으로선 북한 최고지도자가 신속하게 사과의 뜻을 밝힌 데 대해 의미를 부여해 파장을 최소화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이 무참하게 살해된 공무원 유족의 분노와 북한의 만행에 몸서리치는 국민들의 참담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북한의 '면피성' 사과 한마디에 이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북한을 감싸는 행태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즉,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여권이 북한의 진정성 없는 사과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애통한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맞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부터 천명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여권의 굴욕적인 저자세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국민에게 한 약속과도 다르다.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이던 2017년4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북한을 향해 "북한에 경고한다"며 "북한은 도발 즉시 국가적 존립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문재인은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저와 우리 당은 강력한 안보를 바탕으로 북한 도발을 단호하고 확실하게 억제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마치 김 위원장의 눈치를 보면서 북한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일각에선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김정은 심기경호가 더 중요하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번에 우리 국민이 희생되는 동안 청와대와 정부, 군은 아무런 조치 없이 지켜만 본 것으로 드러나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현 정권은 출범 후 '운전자론' '중재자론' '촉진자론'을 내세워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의 평화타령은 요사스런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자위적 핵억제력'을 이유로 핵과 미사일 전력을 증강시키고 호시탐탐 도발을 노리고 있다.
내달 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일에는 사실상 건조가 마무리된 신형 잠수함(로미오급 개량형)을 진수하거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를 강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남북교류협력을 강조한 올해 6월15일 다음날에는 우리 국민들의 수백억 혈세가 투입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보란 듯이 폭파하는가 하면, 김여정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문 대통령을 향해 "맹물 먹고 속이 얹힌 소리 같은 철면피하고 뻔뻔스러운 내용만 구구하게 늘어놨다"고 조롱까지 했다.
북한이 문 대통령과 현 정권을 우습게 보지 않고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니 우리 국민들의 목숨 또한 가볍게 보는 것 아닌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은 국가 안보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경각에 달렸을 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지키는 것이 대통령의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려면 국민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철저한 의지와 정신력,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문 대통령의 47시간 행적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1인 시위를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면서 소극적 대응만 고수할 때가 아니다.
이제라도 국민 앞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고 진상 규명 및 관련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혀야 한다.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 결코 빈말이 돼선 안된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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