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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미중·전쟁` 3부작 대치 편 23일 방송
입력 2020-07-21 16:53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양소영 기자]
경제·무역 갈등과 군사·안보 분야의 긴장, 최근 가치충돌로까지 이어진 미·중 간의 신 패권 경쟁, 그 시작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가을부터 1953년에 걸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했던 전쟁, 이 전쟁은 트루먼, 맥아더와 마오쩌둥 등 미·중 지도자의 대결이자, 군 지휘부의 치열한 전략 전술의 대결이었다. 미·중 충돌로 한반도는 국제 질서의 각축장이 됐다. 한반도의 정전 체제를 만든 미국과 중국, 이 두 큰 힘이 충돌하며 일어난 전쟁의 여진은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진행 중이다. 2020년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1950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미·중간의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참전했다. 미군 연인원 178만 9천여 명이 참전했고 9만 2천여 명이 부상, 3만 6천여 명이 전사했다. 중국 역시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펼쳤으며, 전쟁 기간 중 최대 122만여 명의 중국군이 참전했다. 전쟁으로 중국군 20만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13만여 명이 전사했다(한국 측 추정).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오랜 기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미군과 중국군의 격돌을 미·중 전쟁의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전선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사이, 미국과 중국은 정전 협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52년 2월, 포로 문제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협상은 또다시 결렬되고 한반도는 이념전과 심리전의 무대가 됐다. 전쟁 종결을 둘러싸고 미국에서는 대논쟁이 벌어졌다. 군비와 경제력 증강을 위한 주안점을 ‘유럽에 둘 것인지, ‘아시아(중국)에 둘 것인지를 두고 미 지도자들 사이 주장이 엇갈렸다. 1950년 12월, 아이젠하워가 NATO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맥아더는 해임된다. 트루먼과 맥아더를 주축으로 펼쳐진 미국의 대논쟁을 따라가 본다.
1950 전쟁 이후 세계는 빠르게 냉전 구도로 개편되고, 미·중 충돌은 1964년 중국의 핵실험을 둘러싼 미국의 공격 계획과 1965년 발발한 베트남전까지 이어지며 기나긴 대치에 들어간다. 현재까지도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 정책으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미·중. 전쟁의 결론은 나지 않은 채, 더 많은 과제를 남긴 70년 전 미·중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주젠룽 도요가쿠엔대학 교수는 스탈린은 조선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게 되면 유럽에 대한 압력을 쇠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포로 문제에 대해 전혀 양보하지 않고 미국과 끝까지 가겠다고 한 것이 전략”이라고 말했다.
윌리엄 스톡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지금은 냉전 시 마오쩌둥이 펼쳤던 혁명 전략을 실행하지 않지만,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주요 전략적 경쟁자”라고 이야기했다.
1950 미·중전쟁에서부터 2020 미·중 신패권 경쟁을 다룬 ‘1950 미·중전쟁 대치 편은 오는 23일 오후 10시 KBS1에서 방송된다.
skyb1842@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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