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부고속도로 준공 50주년을 기념해 새로 세운 기념비에 박정희 전 대통령 이름이 빠진 사실이 알려진 후 '박정희 지우기'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50주년을 맞아 만든 행사 영상과 선언문비에도 박 전 대통령 언급이 없어 지역에서 논란이 일었다. 국회사무처는 '박 대통령 영단에 의하여'라는 문구가 담긴 국회의사당 준공기를 올해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LED디스플레이로 가리는 공사를 추진 중이다. 보수 시민단체 등 일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가 모두 있는 만큼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지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친일 전력 등을 문제 삼으며 박정희 지우기에 침묵 또는 동조하는 모양새다.
◆ 박정희 빠진 '경부고속도로 준공 50주년 기념비'
박 전 대통령 지우기 논란이 다시 불 붙은 것은 매일경제가 지난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50주년 기념비에 박 전 대통령 이름이 빠졌다고 보도하면서다.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준공을 축하하며 지금의 추풍령휴게소(경북 김천) 인근에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을 세웠다. 그리고 한국도로공사 등은 지난 7일로 준공 50주년을 맞이해 기존 준공기념탑 오른쪽에 새 기념비를 세웠다.
문제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명의의 준공 기념비에 '박정희'라는 이름 세 글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김 장관은 기념비에 "(경부고속도로는)5000년 우리 역사에 유례없는 대토목공사이며,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고 국가발전과 국민생활의 질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국민정신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고 새겼다. 기념비 옆에는 주원·이한림 전 건설부 장관을 비롯해 건설부 관료, 국방부 건설공병단 장교, 설계 건설업체 관계자 등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한 530여명의 이름을 새긴 명패석을 세웠다.
그러나 어디에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없어 보도 후 "경부고속도로 기념비에 어떻게 박 대통령이 없을 수 있느냐"는 반발이 빗발쳤다. 한국도로공사는 해명자료를 내고 이 기념비가 '건설 참여자 명패석'이라며 "건설공사 참여자로 명단을 세겼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기념물의 정식 명칭은 '준공 50주년 기념비'가 맞다. 박 전 대통령 이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헌정인인 김 장관 이름은 큼직하게 새겨져 눈길을 끌었다.
530여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진두지휘한 박정희 전 대통령 이름이 빠져 있다. [이윤식 기자]
◆ 구미산단 50주년 영상·선언비문에도 빠져지난해에는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50주년 기념식 영상과 선언비문에 박 전 대통령이 빠져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구미시 등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구미 구미코에서 열린 구미공단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상영된 6분짜리 홍보영상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등 현 더불어민주당계 대통령 3명만 등장한다. 반면, 1969년 9월 구미공단을 만든 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현 미래통합당계 대통령은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지난해 11월에는 구미 광평동 수출산업탑 앞에 설치된 '선언문비'에 박 전 대통령이 언급돼 있지 않아 또 논란에 휩싸였다. 이 선언문비에는 '1969년 공업단지 조성의 첫 삽을 뜬 이래 반세기 만에 구미는 첨단IT·전자산업의 요람이자 대한민국 수출의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했다.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거대 산업도시로 거듭난 이 상전벽해의 기적은 오로지 밤낮없이 땀 흘린 기업인과 근로자, 구미시민의 값진 결실이다'는 내용이 담겼다. 선언문비 뒤에는 민주당 소속 장세웅 구미시장, 윤정목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구경북지역본부장, 조정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의 이름이 새겨졌다. 하지만 구미산단 조성을 직접 지휘한 박 전 대통령의 공로 등은 어디에도 없다.
지난해 11월 26일 구미시 광평동 수출산업탑 앞에서 열린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50주년 기념`선언문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구경북본부]
이에 일부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박정희·구미공단 근로자 기념비'를 제작하기 위해 나섰다. 지난해 말 결성된 시민단체 '박정희와 구미공단 근로자 헌정 기념비 제작위원회'는 올해 말까지 구미에 길이 10m의 화강암으로 된 헌정비를 세우기로 했다.강준석 박정희와구미공단 재경본부장은 매일경제와 가진 통화에서 "지난해 구미공단 50주년 영상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이 들어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빠지고 선언문비에도 박 전 대통령 이름이 빠져 난리가 났다"며 "이후 순수하게 민간이 기념비를 만들자 해서 단체를 결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미산단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 근대화의 시초를 부르짖으며 만든 공단이었다"며 "현 정권 들어서 하는 거 보면 사실상 막무가내식으로 역사 지우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 단체는 총 1억원의 목표모금액 중 8000만원 가량을 모았다.
◆ 국회의사당 준공기도 LED에 가려질 처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1층 후면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준공기. 국회사무처는 이르면 내달 준공기 앞에 LED디스플레이로 된 미디어월을 설치할 예정이다. [매일경제]
박정희 지우기 논란은 국회로 옮겨붙을 전망이다. 국회사무처는 오는 9월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국회 본관 1층 뒷편에 걸린 '준공기' 앞에 LED디스플레이를 설치할 예정이다. 1975년 국회 본관이 건립될 당시의 정일권 국회의장 명의로 된 준공기에는 "이 장엄한 의사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에 대한 포부와 민족전당으로서의 위대한 규모를 갖추려는 영단에 의하여 우리들의 지식과 성력과 자원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룩해 놓은 것이다"라고 새겨졌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해당 공사 입찰공고가 나온 직후 '역사 지우기' 아니냐는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국회사무처는 이번 공사는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일 뿐이며 계획대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국회사무처 관계자는 통화에서 "미디어월 하드웨어 공사는 3억원가량에 계약돼 내달 중순쯤 완성될 예정이고, 영상콘텐츠는 조만간 입찰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며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 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 사업은 20대 국회 공간개선자문위원회에서 추진하기로 결정한 사업이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국회의 첫 입구인 만큼 국회가 국민에게 전하는 여러 메시지를 담을 예정"이라면서 "준공기는 훼손하지 않고 그 앞에 LED스크린을 설치할 예정이다. 준공기 내용도 콘텐츠 중 하나로 표출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보수단체 등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경부고속도로야 말로 박 대통령이 밀어붙였다"면서 "대통령이 내린 결단에 대해 이름 석자는 쓰는게 도리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강준석 본부장도 "기념비 등에 사실 그대로만 해달라는 게 우리 주장"이라면서 "공과(功過)를 구분해서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잘 한 것은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사안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당권주자인 이낙연 의원은 지난 2005년 국회 운영위 국회사무처 국정감사에서 "국회도 '역사바로세우기'에 동참할 때"라며 국회 준공기 문제를 거론했다.
이 의원은 당시 "국회도 대통령이 포부(평화통일에 대한)를 실현하는 도구나 통로의 하나라는 의식과 의사당도 대통령의 영단, 즉 시혜에 의해 건립됐다는 대통령의 전 입법부 우위의 의식, 3권 위에 대통령이 있다는 두가지 유신 의식이 담겨 있다"고 비판했다.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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