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 5층 9호 조사실. 33년 전인 1987년 서울대생 고(故)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 끝에 숨진 이곳 조사실은 시간이 멈춘 듯 과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짙은 녹색 바닥의 조사실 안쪽에는 붉은색 벽돌로 경계를 만든 공간에 세면대와 변기가 설치돼 있습니다. 세면대 위에는 박종철 열사의 영정사진이 놓였고, 영정사진 옆에는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간 0.5m 높이 회색 욕조가 덩그러니 있습니다.
1976년 안보사범 수사를 위해 세워진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 조사실은 군사독재 시절 수많은 민주화운동 인사가 연행돼 취조받고 고문당한 국가폭력의 상흔이 남겨진 장소입니다.
5층에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15개 조사실이 지그재그로 배치돼 있었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한 9호 조사실만 원형이 보존됐고, 나머지 조사실 14곳은 벽지나 바닥 마감, 가림막 등으로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욕조의 부재입니다. 조사실 욕조는 몸을 씻는 용도보다 고문 도구로 주로 쓰였습니다. 박종철 열사도 조사실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하다가 욕조 턱(높이50㎝, 너비6㎝)에 목이 눌려 질식사했습니다. 애초에는 대공분실 내 15개 조사실에 모두 욕조가 설치돼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9호실을 제외한 나머지 조사실에서 모두 욕조가 사라졌습니다.
다만 세면대와 변기는 여전히 다른 조사실에도 남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지만, 손잡이를 내리면 변기 물이 내려가는 등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여러 차례 이름이 달라지고 관리 주체도 바뀌었습니다. 1976년 치안본부(현 경찰청) 산하로 세워진 대공분실은 1991년 경찰청 보안분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2005년에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탄압을 반성하자는 취지로 이곳에 경찰청 인권센터가 설치됐습니다. 현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경찰청으로부터 운영권을 이관받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국가폭력 역사의 한 단편이었던 욕조가 조사실에서 사라진 것은 언제였을까요.
오늘(10일) 경찰청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옛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욕조들은 경찰청 보안분실로 사용되던 2000년 당시 건물 내부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함께 철거됐습니다.
경찰청 관계자는 "5층의 다른 조사실에도 욕조가 있었지만 2000년 내부 공사를 하면서 철거됐다"며 "다만 박종철 열사와 관련한 역사의 증거로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9호 조사실은 욕조와 함께 원형 그대로 남겨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다른 조사실 욕조가 철거된 것이 과거 고문 흔적을 지우기 위한 목적 아니었느냐는 의심도 내놓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욕조가 사라진 정확한 경위는 경찰로부터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경찰이 과거 악랄했던 고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욕조를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후대에 국가폭력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조사실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른바 '학림사건'으로 1981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한 달 간 고문당했다는 71살 유동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안관리소장은 "국군 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서빙고 분실이나 남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청사 등 국가폭력의 상징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며 "암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역사의 현장을 후손에게 남겨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5층 조사실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자는 의견도 있고, 고문 피해자 증언 등을 들을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목소리도 있다"며 "민주인권기념관이 내후년 정식 개관할 예정인데 내년까지 5층 조사실 공간 활용 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박종철 열사를 체포영장 없이 불법체포하고 고문한 것은 국가폭력이었고 그 자체로 범죄행위였다"며 "경찰은 경찰개혁위원회 권고에 따라 전국 보안분실을 본청과 지방청으로 이전하고,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절차적 정의를 지키며 수사에 임하도록 개혁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