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에 이어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전국적 시위로 위기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불신임을 받는 '내우외환' 처지가 됐다.
시위대 전체를 '극좌 세력'으로 규정하고 정규군 투입도 불사하겠다던 무리수가 결국 공화당 출신 원로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다.
흑인으로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83)은 7일(현지시간) CNN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사회 문제에 있어 조 바이든과 매우 가깝다"며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파월 전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헌법을 방기하고 거짓말을 일삼는다"며 "모든 미국인들은 자신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발끈한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트위터를 통해 "뻣뻣한 파월은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며 그가 과대평가된 인물이라고 깎아내렸다. 파월 전 장관은 4년 전에도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유출된 이메일에서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가리켜 "국가적 수치, 국제적 왕따"라고 불렀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미트 롬니 상원의원,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부인 신디 매케인 등이 트럼프 대통령을 11월 대선에서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매케인과 롬니는 각각 공화당의 대선 후보를 지낸 인물이다.
롬니 의원은 이날 워싱턴DC 가두행진에 수백명의 복음주의 신자들과 함께 참여해 "폭력과 잔혹성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 시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처음이다. 또 4년 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잽 부시, 하원의장을 지낸 폴 라이언과 존 베이너,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등도 누구에게 투표할지 즉답을 거절했다고 NYT는 전했다. 사실상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는 얘기다.
앞서 트럼프 정부에서 '팽' 당한 존 켈리 전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도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고 오는 23일에는 외교 실책을 까발린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신간도 출간된다.
공화당 내에서 '반(反)트럼프' 운동이 벌어진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일부 공화당원들이 자금을 마련해 출범시킨 '링컨 프로젝트'는 트럼프 대통령을 낙선시켜야 한다는 영상 광고까지 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을 '리노(RINO·Republican In Name Olny)'라고 낙인 찍고 패배자들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대선후보, 하원의장 등을 지낸 공화당의 원로들이 불신임을 선언하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른 문제다.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것은 아니지만 온건 성향의 공화당원들이나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일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11만명의 사망자를 낸 코로나19 팬데믹보다 이번 시위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선 가상대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42%로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49%)에게 오차범위 밖에서 뒤졌다. 또 최근 일주일간 실시된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바이든 전 부통령이 50%를 넘는 지지율을 확보해 트럼프 대통령과의 격차를 10%포인트 이상으로 벌렸다.
이번 시위 사태는 또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코로나19에 따른 '자의반 타의반' 은둔을 자연스럽게 끝내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뛰어드는 기회가 되고 있다. 그는 8일 텍사스주 휴스턴을 방문해 백인 경찰에게 희생된 조지 플로이드의 유족들과 만날 예정이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의 분열 정치를 4년 더 택하느냐, 위대한 전진을 택하느냐의 변곡점에 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시위 사태로 유색인종과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율이 올라갈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은 민주당에게 고무적인 상황이다.
몸이 달은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경제 회복에 집착하는 모양새다. 그는 이날 "나는 미국 역사상 최고이고,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를 건설했다"며 "다시 한번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주장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탄핵 사기가 아니었다면 바이든에게 25%포인트는 앞섰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역전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경제 살리기에 적합한 후보를 물으면 예외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우위에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트럼프 캠프는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라는 재선 슬로건을 재검토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하면 경제 회복을 강조하는 새 슬로건이 발표될 것"이라고 전했다. 바이든 전 부통령을 공격하는 별칭도 '졸린 조'에서 '워싱턴 늪의 네스호 괴물'로 바꿔부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바이든 전 부통령을 부패한 기득권 정치인으로 몰아부치려는 전략이다.
[워싱턴 = 신헌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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