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년간 북한 취재한 佛다큐감독 "남한 사람의 北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입력 2020-06-03 14:33  | 수정 2020-06-10 14:42
`백년의 기억`을 연출한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 [사진 제공 = 본인]

◆ 북한 사람 자존심 세, 일방적 원조보단 윈윈 관계 원해
"북한 사람은 자존심이 매우 세고, 예민해요. 그들은 그저 남한이 더 부유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지원받는 건 원치 않습니다."
20년 간 북한을 취재한 프랑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49)에게 '한국인이 북한에 갖는 가장 큰 오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는 "얼마나 많은 북한인이 남한 사람들과 진정성 있고 평등한 거래를 하길 원하는지 한국인은 모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부 한국인이 갖는 편견과 달리 북한 사람은 남한으로부터의 일방적 원조를 원하기 보다는 서로 윈윈(win-win)하는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다.
북한최고인민회의 소속 정구강 장군이 한반도 분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에무시네마]
◆ 북한 고위 간부 인터뷰 승인 받는 데만 3년 걸려
프랑수아 감독이 한반도 100년 역사를 돌아보며 남북한 관계 해법을 모색한 '백년의 기억'(전국예술영화관협회 배급)을 들고 돌아왔다. 전작 '평양 유랑'으로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된 이후 약 1년 만이다. 분단 역사를 다룬 작품은 여럿 있었으나 이번 작품엔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북한 고위 간부 인터뷰를 다수 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남북문제에 정통한 남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교차 편집함으로써 둘의 관점을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북한 간부와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부분이 이번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노라고 털어놨다.
"그들을 설득하는 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들 역시도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국전쟁, 김일성, 박정희 등 한국사의 근본적 측면에 대해서 남북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죠. 북한 사람들은 본인의 행동이나 말이 이 영화에서 나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평양에서 만난 어떤 이는 제게 '그냥 두 편의 영화를 해. 하나는 우리가 말한 북한의 역사에 대한 것, 또 하나는 남한 사람이 말한 남한 역사에 대한 것으로. 당신에겐 훨씬 간단할 거야'라고 말해주기도 했죠."
북한 당국으로부터 승낙을 받기까진 무려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당신들의 주장이 왜곡돼서 나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모든 작업 결과를 한 번 더 체크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마지막에 잘 풀려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위 간부들의 인터뷰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됐어요."
6·12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과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백년의 기억`에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각종 사건이 남북한 고위 관료와 외국의 정치인, 학자를 통해 다각으로 분석된다. [사진 제공 = 에무시네마]
◆ 남북 인터뷰 교차 편집…김문수, 박원순, 이희호 등도 참여
그렇게 해서 영화엔 북한 각계 인사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갔다. 정구강 장군, 정현익 장군, 평양 인민위원회 위원장 차희림 등 북한 당국과 군 관계자부터 김태송 작가, 리통섭 기록영상 감독을 비롯한 문화계 인물이 발언한다.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해 6·25전쟁, 최근의 사건인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자신들 의견을 드러낸다. 어느 정도 필터링이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북한 당국 공식입장이나 선전매체 보도가 아닌 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건 이 영화의 차별점이다.
같은 사건을 휴전선 아래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도 엇갈려 배치한다. 박원순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북한 출신 이호철 작가,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 이희호 여사가 인터뷰에 참여했다. 아울러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서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정치인과 역사학자 의견을 들어 객관성을 최대한 담보하려 시도했다.
"가능하면 역사적으로 그 순간에 활동하고 있던 사람을 인터뷰하고 싶었어요. 단순히 해설자나 학자들같이 제2의 분석자가 아닌 사람들 말이에요. 인터뷰 대상이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집중하게 하는 인터뷰 기술을 사용했어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날의 평양 시내 분위기를 취재진이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리통섭 공식 기록영상 감독은 "기자들은 순간의 흥분으로 역사적 사실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촬영에 집중했다고 전한다. [사진 제공 = 에무시네마]
◆ 북한 인터뷰이 "리비아 카다피 핵 포기한 건 제 손으로 제 무덤 판 격"
그는 한반도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질문한다. '북한이 서울을 정복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1994~2000년 기근 때 얼마나 힘들었나' 등이다. 남한 인터뷰이뿐만 아니라 북한 출연자까지도 경직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
이를테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결국 붕괴한 소식이 북한 사람들에겐 두려움을 안겼다고 리통섭 기록영상 감독은 회고한다. '리비아가 미국에 주눅이 들어서 핵무기를 다 철폐했다'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팠다'는 등의 언어로 돌아본다. 북한 사회가 비핵화로 쉽게 나아갈 수 없는 데에 작용하는 일상적인 공포가 무엇인지 가늠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감독은 그들의 언어가 '명료해서' 좋았다고 한다.
"그들이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교과서적인 말을 반복할까봐 두려웠어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렇지 않았죠. 고위 관료들은 자신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어요.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 인터뷰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해요."
`백년의 기억` 속 한 장면. [사진 제공 = 에무시네마]
◆ 북한 전문 영화감독이 본 北의 강점은? "자립심이 장점이자 최대 약점"
프랑수아 감독은 2000년 방송기자 신분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의 만남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이후 '프론티어와의 전쟁'(2003),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2013), '평양 유랑'(2019) 등을 작업하며 한반도 문제를 본인 커리어의 중심에 뒀다.
이토록 오랫동안 북한을 들여다본 기록자가 느끼는 북한의 최대 강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자립심'이라고 답하며, 그것은 반대로 북한의 발목을 잡고 있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자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북한 사회가 가장 어려운 충격도 견딜 수 있게 해줬어요. 그러나 우리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북한의 약점이기도 해요. 북한이 다른 사람과, 조직, 기업, 국가들의 도움을 얻고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해버리니까요."
감독의 전작 `평양 유랑`의 한 장면. 프랑수아 감독은 "유원지에서 노동자와 농부도 많이 봤다"며 "여가는 북한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 평양 유흥 상위 1%만 즐기냐고? "NO, 北서도 레저는 중요한 부분"
몇몇 관객은 그가 '평양 유랑' 등 전작에서 보여준 북한 모습이 빙산으로 치면 가장 윗부분만 보여준 건 아닌지 지적한다. 여느 나라의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휴대폰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년들이 과연 북한에서 몇 %나 되겠냐는 물음이다. 박람회와 볼링장, 유원지에서 주말을 즐기는 가족은 상류층 일부의 사례가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수영장과 놀이공원에서 우리는 노동자와 농부들을 만났어요. 레저는 현대 북한사회에서 중요합니다. 오래된 유원지는 정말 싸고 대부분 주민에게 열려 있어요. 새로 지은 것들은 비싸긴 하지만 많은 평양 시민이 방문하고 싶어 합니다. 회사에서 보상으로 입장권을 얻거나 국경일을 활용하죠."
`백년의 기억` 포스터 속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서고 있다. 이 영화는 전국 예술영화관 15곳이 소속된 전국예술영화관협회에서 수입·배급한다. [사진 제공 = 에무시네마]
◆ 11일 개봉 "DMZ 위로 작은 다리를 놓는 영화 되길"
'백년의 기억'은 오는 11일 개봉한다. 남북한 교류에 한 획을 그은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며칠 앞두고서다. 그는 영화 속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남과 북이 서로 대화하듯, 이 작품이 둘을 연결하는 교량이 되길 소망한다.
"저는 외국인이고 한국어를 하지도 못해요. 하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어요. 남과 북을 모두 오갈 수 있다는 거죠. '백년의 기억'을 보는 모든 관객이 한반도 분단의 비극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DMZ 위로 작은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거예요. 한국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이 정말 영광스럽고 행복해요."
[박창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