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차두리 “내 최고의 팀은 2011 아시안컵…한일전 패배는 실망”
입력 2020-04-19 09:37 
차두리는 자신이 뛰었던 최고의 팀으로 2011 아시안컵 대표팀을 꼽았다. 사진=천정환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 이상철 기자
차두리(40) 서울 오산고 감독이 2011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결승 한일전 패배가 가장 실망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AFC는 18일(현지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차 감독의 축구 인생 인터뷰를 전했다. 가장 사랑받은 태극전사 중 한 명이었던 차 감독은 두 번(2002·2010)의 월드컵, 세 번(2004·2011·2015)의 아시안컵에 참가해 온 국민과 웃고 울었다.
A매치 통산 성적은 76경기 4득점.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 진출에 기여했던 그가 뽑은 ‘최고의 팀은 2011 아시안컵이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마지막 국제대회였으며 손흥민을 비롯해 지동원, 구자철 등 재능 있는 후배들이 등장했다.
차 감독은 2011 아시안컵 대표팀은 전술과 선수 구성에서 내가 뛰었던 팀 중 최고의 팀이었다”라며 젊은 선수들이 있어 더 많은 롤모델이 돼야 했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경기를 훨씬 흐름을 잘 읽고 시야가 넓어졌다. 선수로서 성숙했던 시절이다”라고 밝혔다.
한국의 아시안컵 우승은 1960년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우승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준결승에서 일본과 승부차기 혈투 끝에 졌다. 한국을 꺾고 결승에 오른 일본은 통산 네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차 감독은 우린 당시 대회 4강에서 일본에 승부차기로 졌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경기 중 하나였다”라고 말했다.
최고의 순간은 한일 월드컵이다. 결과적으로 ‘차미네이터로서 맹활약을 펼치며 거스 히딩크 감독의 결정이 옳았으나 대회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발탁이라는 평가였다.

차 감독은 나도 깜짝 놀랐다. 당시에는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입문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대학생의 선발은 센세이션이었다”며 히딩크 감독님은 내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청소년 대표팀에서 뛴 적도 없고 국제대회도 거의 나가지 않았던 나를 두고 논쟁이 일기도 했다. 편견은 극복해야 할 도전이었다”라고 과거를 떠올렸다.
2002년 6월, 행복한 꿈을 꿨던 차 감독이다.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뛰는 건 꿈이었다. 출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이야기했다.
월드컵 첫 승을 넘어 첫 16강 진출, 나아가 4강 신화를 만들면서 ‘국민의 영웅이 됐다. 어디를 가도 ‘국빈 대우를 받았다고. 차 감독은 다들 월드컵에 열광했다는 걸 월드컵이 끝난 뒤 실감했다. 식당에서 밥값을 낸 기억이 없다”며 웃었다.
차 감독은 아버지 차범근 전 2017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다. 아버지의 주말 경기 활약 여부에 따라 월요일 학교에서 태도가 바뀌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엔 오늘날같이 게임이나 인터넷이 없다. 축구는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다. 축구선수가 되는 건 모든 어린이의 꿈이었다”며 때론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의 업적은 내겐 너무 큰 벽이었다. 그래도 축구선수로서 아버지는 나의 목표였다. 아버지처럼 훌륭해지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rok1954@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