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INTERVIEW 배양숙의 Q] 정치철학자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에게 세계시민이 가야할 정치 참여의 길을 묻다
입력 2020-04-08 14:58  | 수정 2020-04-08 16:01
경기도 용인 개인 서재에서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와 배양숙 글로벌 인사이트포럼 대표.

Q. 3월 청년 기업가의 공천 확정이 하루만에 철회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A. 총선을 앞두고 양당들이 정치 신인을 영입해 과거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어요. 청년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정치인은 어떤 덕성을 갖춰야 되는지, 또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는 거죠.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향과 본인이 소속되거나 지지하는 정당이 과연 맞는지…. 청년당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내부 검증을 거쳐 정치인이 되거든요.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어요. 정치 신인관련 이번 사건이 터진 것을 보면, 우선 보수당의 경우에는 여성이 필요한데. 여성이 없어요. 거기다 젊은 사업가를 영입해서 새로운 세대를 대변해야 돼요. 그런 잣대들에 맞는 사람이었지요. 이 사람이 과연 어떤 이념을 추구하는 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검증이 안 된 거잖아요. 그리고 그 젊은 기업가 스스로도 정치를 하고 싶다면,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당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 당, 저 당 간을 보다가 그런 결과를 맞이한 겁니다. 한국 정치의 현실입니다. 지금 새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선명도나 책임감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선거에 당선된다 하더라도 당내 활동을 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못 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사람들이 정치를 하려 할까요? 틀림없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보시키는 겁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구시대정신은 썩었다, 물갈이 해야 된다, 젊은 피 수혈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는 매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실질적으로 늘 선거 때마다 20% 내지 30%, 많게는 40%까지 물갈이가 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들은 똑같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반독재 투쟁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주화 제도를 정립을 하는 등 성공을 했지만, 정당 자체 민주주의의 경우 지배 구조라든가, 의사결정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못해요.
Q.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A. 젊은 피 수혈을 하면, 그들이 들어가서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 행동 양식을 통해 기존의 관습과 제도를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신인이 들어가서 그렇게 못합니다. 심각한 문제죠.
Q. 정치를 진리의 영역으로 볼 것인가, 의견의 영역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자들의 오랜 토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정치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의견의 영역이에요. 한나 아렌트도 그렇게 봤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우연과 가변성이 지배하는 영역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행위하는 영역이고, 상황에 따라 인간은 이렇게도 행동할 수 있고 저렇게도 행동할 수 있는데, 제때에 제대로 된 결정을 내려서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상황에 맞는 대안을 발견해 내야 되는 것 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어떻게 하면 잘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를 함께 논의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의견의 영역'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정치를 진리의 영역이라고 본 사람이 플라톤이에요. 플라톤이 이상국가를 발전시키고 본인도 시칠리아에 가서 직접 정치를 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잖아요. 즉 ,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진리가 있고 이 진리를 가져다 다른 사람들에게 실현을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와 독재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비판한 사람이 칼 포퍼죠.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저서에서 플라톤처럼 이렇게 하나의 진리만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폐쇄적인 사회일 뿐이고, 이 폐쇄적인 차이는 당연히 독재와 전체주의로 갈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 정반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때로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각기 다른 의견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 '내 생각은 진리야', '너희들은 나의 생각을 따르기만 하면 돼', 이렇게 되면 이건 독재죠. 민주주의가 아닌 거지요. 그래서 정치는 의견의 영역이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나아렌트가 유명한 말을 해요. "하나의 의견만 존재하는 곳에는 여론이 없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야 하는 거죠.
전 세계가 지금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초기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견됐을 때, 처음 폭로한 리원량이라는 의사가 죽었잖아요. 그때 대응만 잘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초기 대응에 완전 실패한 거죠. 그 다음에도 인구 1000만명이 되는 도시를 섬처럼 완전히 봉쇄해버린 겁니다. 그러고선 "우리처럼 이렇게 대처 해야 코로나 바이러스를 봉쇄해서 감염을 막을 수 있다"면서 전세계에 중국식 대처방식을 홍보했습니다.
리원량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요.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양한 의견이라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보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가 실질적으로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는 완전히 의견의 영역이라고 보고요. 정당이든, 조직이든, 제도이든 하나의 의견, 하나의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말하는 한 사람만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도자가 아무리 선하게 보일지라도 정치에 대해서는 병적이며, 이를 우리가 아주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형성되어 있다.' 이는 플라톤이 한 얘기예요.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국민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식으로 일을 하는 것 같고 오히려 의사협회에서는 '봉쇄를 해야 된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봉쇄를 초기에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전파됐는지는 아직 몰라요. 자칫 잘못 말하면 음모론이 되기 때문에…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원지가 중국의 우한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오는 수많은 교포들과 중국인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이 전세계에서 중국과 교류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 중 하나일 겁니다. 중국에서 전파됐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거예요. 예컨대 중국에서 온 간병인인지, 그들이 모르는 사이 신천지 교인들에게 전파를 한 것인지, 아니면 신천지 교인들이 우한 지구에 가서 옮겨와 한국에서 전파를 한 것인지… 그런데 이제까지의 감염경로를 보면 그것도 확증할 수 없는 거죠. 분명한 것은 중국에서 왔다는 거예요.
코로나 19에 대한 대처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 중 대부분은 첫째, 초기대응이 실패했다고 봅니다. 이건 인정해야 되는 거죠. 지금도 잘잘못을 따지기엔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왜 초기대응을 실패했을까요. 대만과 싱가포르, 홍콩이 하는 방식을 안 했단 말이에요. 중국의 눈치를 봤죠. 우리가 중국 정부를 설득하고, 국민의 안전과 방역의 차원에서 '우리는 이렇게 조금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요? 이런 식으로 초기 대응을 잘 했더라면, 우리나라의 경우 여기까지 안 왔을 수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 초기대응은 실패했다는 거고요.
둘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했을 때, 외국의 연구소들도 처음부터 팬데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예측 했어요. 일주일, 한 달 만에 해결될 성질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대처하는 장기적인 대안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나면 대응을 하는 임기응변식 대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사례가 보입니다. 지금 코로나19가 전혀 통제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조기 종식될 것이라고 얘기를 했었고, 그 점이 국민을 우왕좌왕하게 만든 것이지요. 마스크 대란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부분은 우리가 반성하고 향후를 위해 복기를 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되겠죠. 그 이후에는 비교적 잘 하고 있는데, 잘한다는 것이 정부, 정치인들이 아니라 관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관료들의 투명한 정보공개, 전문가적으로 헌신하는 의료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칭찬할 만한 성숙한 시민의식,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져 실질적으로 우리나라가 모범사례로 이야기될 정도로 잘 하고 있는 겁니다.
세계 언론들이 '코로나 19에 대한 대처방식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중국식, 다른 하나는 한국식 대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권위주의적, 다른 하나는 민주적 대처 방식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적 대처방식은 어떤 지역을 봉쇄 혹은 통제하지 않고 국민의 삶을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코로나 19를 대처했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이라는 거예요.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방역 문제는 방역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관료들은 관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시민들은 국가의 정책에 합리적으로 따라야 되는 거죠. 이게 3박자인 겁니다. 정부가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이런 결정을 취할 테니 당신은 따라오시오'라고 한다면, 그건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지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전염병은 21세기 문제입니다. 지금도 코로나19가 조기 종식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독감처럼 발병할 수도 있고, 내년에 재발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어요. 예컨데 에볼라, 사스 , 메르스, 신종플루들이 계속 나왔죠. 이 사실들을 감안하면 코로나19라는 것이 어쩌다가 한번쯤 도는 전염병이 아니라는 거지요. 미래에도 이런 식의 전염병이 또다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데, 즉시 대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에서의 실질적인 방안이 마련돼야 하는 것이지요.
Q. 타 매체에 기고했던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주제의 칼럼에 '한 철학자의 이론과 정치적 태도를 구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철학적 이론과 천박한 수준의 광장 파시즘을 구분하고 싶다'고 했던 독자의 의견에 대해 첨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까?
A. 파시즘, 전체주의라는 개념이 너무나도 많이 쓰여서 강력한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특정한 정치문화에 대한 비판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죠. 제가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는 칼럼을 쓸 때만 하더라도, 파시즘이란 개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 특히 운동권 사람들, 진보적인 운동권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제가 그렇게 쓴 이유는 우리 사회가 광화문 촛불 혁명 때만 하더라도, 독재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독재의 잔재인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주 소수의 극우 세력만 제외하고는 광장에 나갔던 사람들은 다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 정부를 지지 했어요. 저도 사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기 반을 지나는 시점에서 실망하는 것은, 그 엄청난 정치적 자원을 활용해 우리 사회를 통합하기보다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수치로 다 검증이 되지요. 실질적으로 야당 세력과의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고요. 물론 야당도 야당답지 못하는 때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정권을 잡고 기득권 세력이 된 진보세력이 국민의 반을 대화의 상대로조차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 내에는 내부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이 돼야 되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국 사태가 터졌을 때 조국을 지지하고 수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작은 잘못은 큰 대의를 위해서는 용납될 수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요. 근데 저는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해요. 그런 의미에서 명분도, 도덕성도 잃은거죠. 이제까지는 도덕성을 아주 강력한 무기로 생각했던 진보 세력이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불러일으킨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지 기반이 흔들리는 거죠. 국민의 지지를 못 받으면 어떤 정치 권력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구조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프레임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조국 수호, 조국 지지를 가져다 검찰개혁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 버린거죠. '검찰을 개혁해서 안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한 명도 없어요. 문제는 이 두 가지가 별개의 건인데, 그것을 가져다가 치환하다시피 한 것이죠.
결과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유엔 회의에 참석한 후 검찰개혁이라는 말을 꺼낸 다음에, 서초동 검찰청 앞에서의 시위에 어마어마한 숫자가 몰린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대통령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제도를 다 건너뛰고, '나를 지지하는 국민과만 직접 대화하겠다'고 생각한 것 밖에 안 되는거죠. 실질적으로 국민이 쫙 반으로 갈린 거예요. 과거에는 촛불혁명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이 이제 거꾸로 보수의 집회가 됐습니다. 한쪽에는 서초동 집회가 있고… 이제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고 민주적인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네들이 비판하는 권위주의로 퇴보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회학자가 있어요. '독재'하면 파시즘이라고 붙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도자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열원과 선전, 선동을 통해서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고 한다면 그건 파시즘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고, 그런 현상을 저는 우리 사회에서 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경계해야 된다', 그렇게 칼럼을 쓴 것이지요. 저의 이런 해석, 분석과 진단이 틀릴 수도 있어요. 또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어요.
Q. 다른 의견, 다양한 생각에 대해 흑백 논리로만 '너는 무조건 나쁘고, 나는 무조건 맞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A.. 재밌는게, 해당 칼럼을 쓰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이메일로도 연락하고 사무실로도 전화하더군요. 더 놀라운 것은, 해당 신문사에서 '이진우의 의심'이라는 코너로 두 번 칼럼이 나갔는데, '기득권이 된 운동권'이라는 주제를 통해 운동권이 그 논리로부터 벗어나야 한 단계 성숙한 민주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다음 칼럼 제목이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였는데, 해당 신문사 담당자가 압박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조국 지지세력, 운동권 세력, 현 정권 등 알 수는 없지만 나 때문에 담당자가 힘든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칼럼 연재하면서 자기검열까지하고 싶지는 않아서 멈췄습니다.
언론에서 이렇게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제 갈 길을 가지 못한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도, 칼럼니스트도 아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한 정치철학자일 뿐인데 말입니다. 칼럼 쓴 지 오래 돼서 이런 비난을 받은 게 한두 번은 아니긴 하지만 이런 식의 진영논리, 흑백논리로 인해서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겉으로는 민주화돼 있지만 우리 사회는 완전히 분열되어서 적대적으로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향후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누군가는 이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저는 대통령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 했는데, 못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Q. 그런 맥락에서 이번 4.15 총선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A. 이번 4.15 총선은 코로나19가 모든 문제를 덮어 버렸어요. 예를 들어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 정부의 실정, 문제점, 이런 것조차 다 덮어버렸어요. 이슈가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4.15 총선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코로나19 영향을 실질적으로 받을 거에요. 투표장에 나가면서도 '감염의 위험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부터 시작해서 투표율도 문제가 되겠죠.
근데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이슈가 묻혀버렸다는 거죠. 의회 민주주의 제도에서 총선이라는 것은 선거구에서 자기의 이익과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거예요. 정말 능력이 있는지, 어떤 정치적 이념과 정책을 갖고 있는지를 보고 뽑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번 총선에서는 이런 문제도 다 덮여 버릴 것 같다는 거죠.
그러면 무엇을 보고 투표를 해야 하는가? 저는 간단하게 생각해요. '우리가 민주적으로 건강하려면, 어떤 정치 제도와 정치 문화를 가져야 하는가?' 이 관점에서만 보면 투표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한 것은 어떤 권력이든, 정권이든 간에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해요. 균형이 있어야 해요. 견제와 균형의 제도라고 그러잖아요. 민주주의라는 것이 지난번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울과 경기 지역의 경우에는 야당 시의원이 거의 없거나 전무합니다. 이건 민주제도라고 할 수 없는거죠. 좋은 것도 과하면 건강하지 못한 거죠.
대한민국은 지난 반 세기동안의 산업화, 민주화를 통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총선은 '민주제도를 성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의미에서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보고 뽑기에는 현실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면대면, 지역유세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할 수가 없는거죠.
Q. 정치철학자로서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의 정치와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를 비교를 해 주신다면?
A. 서구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는 대한민국은 지방자치가 성숙하지 않다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내 삶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가, 우리 지역사회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되는가,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는거죠. 서양에서는 항상 정치적 이슈가 구체적인 문제인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가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 탓도 있기는 하지만,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밀접한 문제들은 조금 경시되고 오히려 거시적인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수가 있겠습니다.
둘째, 분단시대의 논리로, 남북문제로 귀환하고 환원시키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이념투쟁적인 성격이 너무 강합니다. 정치는 실용주의가 돼야 합니다. 핵심적인 예를 들어 올해는 다행스럽게 미세먼지를 덜 느끼셨죠. 코로나19 때문이지요.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의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다 보니 유입되는 미세먼지 양도 줄었지요. 국내도 마찬가지죠. 작년엔 무척 심했잖아요. 미세먼지가 이렇게 발생했을 때를, '화이트 더스트'라고 하는데 뜻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인 거예요. 예전에는 '블랙 더스트'였어요. 오염물질이라고 하면 하늘에 뿌옇고 검정 연기가 나오는 것이었지요. 운에 보이지 않는 먼지이니 더 위험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게 이슈가 돼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년 전만 해도 젊은 엄마들이 이민가고 싶다 할 정도로 미세먼지는 심각한 문제였어요. 그러면 삶의 문제잖아요. 정치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제도를 내놓겠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미세먼지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세먼지가 중국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한 겁니다.
그리고는 가공할만한 정책적 제안이 ( 과학자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인공강우'를 서해안에 생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이슈들이 너무 이념지향적입니다. 이는 큰 차이 중 하나 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는 지난 50년간 양당 제도가 거의 정착이 돼있어요. 다수 의견을, 또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가 성숙해 있지는 않아요. 제가 유학했던 독일은 연방제입니다. 주 정부에, 지방자치가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전 분야가 중앙으로 집중되지않아요. 베를린에 있는 대학이 지방소재 대학보다 더 우수하지도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더 우수한 대학들은 지방에 많이 있어요. 양질의 일자리도 베를린보다 바덴뷔르템베르크, 함부르크 등의 지방에 많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다당제입니다. 제가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넘어가던 시기에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헬무트 슈미트 사민당 당수가 물러나고 헬무트 콜이라는 독일 통일을 이룩한 보수당 당수가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특정한 선거 제도에 의해서 다당제가 생기면서 녹색당, 자민당 등이 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독일 대안 정당도 있지요. '다당제가 되면 통치가 잘 안 될 것이다, 정책을 수행하는 것도 효율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10여 년이 흘러가면서 달라졌지요. 다양한 의견들이 존립한다 하더라도, 잘 융합하고 통합해 나갈 수 있는 나름의 정치 문화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의견과 소수당의 출연이라는 것에 민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가장 큰 차이점은 정치인의 자질입니다. 막스 베버가 정치인이 되려면 세가지 특성을 가져야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학자, 모든 기업인에게도 해당 됩니다.
첫째, 열정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명확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판단력' 입니다. 절대적으로 옳고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하는 균형입니다.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해야 되는 것이고요. 특정 정당 혹은 특정 이념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능력이 떨어집니다. 시대가 변하는데 지나친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거나, 통일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입니다. 셋째, 책임 윤리입니다. 즉 심정 윤리, 마음속으로 '이건 나쁘고 저건 좋은 것이다'와 같이 주관적으로 둘로 나누는 것을 심정 윤리라고 합니다. 정치인이라면 국민을 책임을 질 줄 아는, 자기의 말과 행위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윤리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 세 가지가 다 없는 것 같아요. 귀결하자면 열정은 없고, 이기심만 뛰어나며,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은 없고, 이념적 광신만 있고, 책임의식은 없으며, 자기네들만 옳다고 하는 복선주의만 있고… 그런 문제 의식이 있는 겁니다.
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Q. 코로나19로 대공황에 준하는 경제 상황이 올 것이라는 예상들이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사회적 거리두기의 장기화로 야기된 공허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를 소환한다면, 이 위기에 어떤 위로와 용기의 말을 해 줄까요?
A. 니체에게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와 덕성을 발전시키려면, 이제까지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 악들조차 극복하고 새롭게 평가해야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 말은 악도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강제적으로 격리된 상태입니다. 니체는 세상에는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길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험난하고 먼 길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저의 생각으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 보면 초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 것입니다. 타인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교류가 단절될 때 느끼는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자신과의 거리두기도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거리두기의 필요이고, 성찰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지요.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강제적으로 고립된 이 시간이지만, 긍정적 의미에서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초반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캠퍼스를 가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학생들을 만나니 어색하고 어수선하니 정리가 안 됩니다. 그러다 최근에 갑자기 '어쩌면 이런 시간이 좋은 시간이고 기회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여유가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코로나19와 함께 불안 바이러스도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마스크예요. 제가 밤이면 꼭 1시간씩 산보를 하는데 공원에 가면 사람들도 별로 없어요.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도 전부 마스크를 하고 다닙니다. 실질적으로는 마스크가 필요 없어요.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거나 본인이 증상을 느끼거나 이럴 경우에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전염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외부에서 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지요. 손을 잘 닦고, 손으로 얼굴을 만지지 않는게 좋은 예방법인데도 불구하고, 불안하니까 쓰고 다니는거지요. 결과적으로 초기대응을 잘못한 것입니다. 마스크에 대해서 정부의 입장이 여러 번 바뀌었잖아요. 초반에는 다 쓰고 다녀라 하더니, 준비도 안 해놓고 없으니까, 이제 안 써도 된다… 그러니 국민들은 믿지를 못하지요.
불안의 바이러스는 신뢰가 상실될 때 생깁니다. 예컨데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는 것일까 믿지 못할 때 우왕좌왕하는거죠. 우리나라의 상품 공급 체인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 할 때에는 사재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이 아주 성숙한 단면은 물건사재기 현상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가 배달시장이 발달돼 있고, 근처 편의점에만 가도 상품들이 충분히 진열되어 있는 것도 또다른 이유이긴 합니다. 불안의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길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문화와 사회로 빨리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역시 4.15총선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의 인생강의 - 이진우 교수
Q. 미셸 푸코가 한 사상가의 정치적 입장을 얘기할 때 '단순히 그 이론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용적 태도도 고려해야한다고 본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비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A. 푸코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것은 'what question'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Who are you?' 도대체 '넌 누구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사회적 지위가 어딘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어떤지등 구체적인 조건들이 결부돼 있는 것입니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 중 하나인데, 동양은 '언행일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똑같아야 된다, 생각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같아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특정 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또 그 사태에 대한 진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러니까 언행 불일치가 나오는 것이지요.
반면 서양 사람들은 실용적입니다. '어떤 사태에 대해서 내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나의 의견이 진리라고 주장할 증거가 없다, 내 말이 틀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내 말이 틀릴 수 있으니 내가 과연 맞는지, 정당한 것인지, 또 내가 생각하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확인하려면 세상으로 나가야 됩니다. 타인들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잖아?" 하면 틀림없이 이견이 제시될 것이고 반박이 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는 판단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승인과 반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얘기하는 실험적 태도 없이는 정치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칼럼 '광장의 파시즘'을 쓸 때도 독선적인 태도가 가장 위험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생각했습니다. 니체가 '확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진리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확신이라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자신에게 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칼 포퍼가 얘기한 것처럼, '백조는 희다'라는 것은 물론 진리죠. 대부분의 백조들이 희기 때문에. 하지만 이 문장이 진리인 것은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입니다. 틀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외부적 억압이 있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가져라 '고 설파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대한민국의 정치적 팬덤 현상에서 목격되는, '내가 속해 있는 진영에서 얘기하는 것은 모두 진리'라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험적 태도, 즉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 미셸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반증주의적인 태도, '진리는 그것이 반증될 때까지만 진리다'라는 겸손한 태도가 전제돼야 정치가 더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Q. 학문적 연구나 어떤 철학적 가치도 '자신이 틀릴 수 있고, 다른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니체가 그랬듯이. 직접 체험했던 고통의 과정이 있었는지요?
A.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의 삶과 연관 지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 입니다. 그래서 늘 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두려고 노력 했습니다. 영어식 표현으로 '사람은 유머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지요. 지난 세기 말에, 유럽과 미국에서 공동체주의, 개인주의 논쟁이 한창 벌어졌습니다. 저는 항상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공동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이론적, 신념적으로는 공동체주의자였습니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권리라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실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우리가 중시하는 공화주의적인 태도를 가져야 된다는 입장이었지요.
제가 한국 사회에서 생활을 하고, 교수로서 학과의 일을 하고, 또 다른 단체 활동도 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우리 사회는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기 보다는 어떤 집단의 논리를 우선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신념적으로는 공동체주의자이지만, 이런 일들을 보면서 상당한 문제점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론적 관점을 바꾸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주의자보다는 더 많은 개인주의자가 나와야한다, 각각의 개인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과거에 저는 공동체주의자라 했었지만, 최근에는 개인주의자가 된 셈입니다. 이런 것들이 저의 큰 변화라고 봅니다.
Q. '우리들의 변질된 집단주의자'라는 키워드에 대해 어떤 의견이십니까?
A. 우리나라는 집단주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가장 작은 의미의 집단인 가족, 우리사회의 이기주의 중에서 가족 이기주의가 가장 심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가족이 우선순위인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어쩔 수가 없는 거지요. '변질된 집단주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의 가치를 전제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기주의와 결합을 할 때, 특정한 공동체가 존속되기 위해 다른 공동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을 때,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진영이란 적대적인 겁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전투가 이뤄졌는데, 이쪽 진영과 저쪽 진영이 삶과 죽음을 두고 싸우는 것이지요. 상대방이 죽거나 굴복하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는 상황에서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결국 진영논리입니다. 집단주의와 이기주의가 결합을 할 때, 집단주의라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변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한국 마피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관피아', '금피아'부터, 세월호 사태 때는 해양수산부와 연관돼 '해피아' 등의 식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집단 이기주의가 결과적으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집단을 활용하려는 연고주의와 연결이 되니 상당히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30대는 그런 성향이 좀 덜하다는 건데, 아직은 모르는 것이지요. 결국 집단주의를 파괴하려면 각각의 개인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Q.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고 했던 니체의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신다면?
A. 니체의 이야기로 했으니 그의 관점에서 대답하자면, 니체는 '진리'와 '진실되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진리'가 객관적으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진실되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우리 언어로 번역하면 '정직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정직이라는 단어가 도덕적인 느낌이 있어 어울리지 않을 듯해 보이지만, 저 스스로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 진실하자' 입니다.
Q. '정치를 어떤 관점에서 사용해야 할까, 어떻게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금합니다.
A.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가?' 하는 쓸데 없는 논쟁이 한참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헌법 조항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그냥 '민주'만 넣자 는 등의 논쟁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해서 제가 이야기하자면,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지요.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도대체 어떤 자유입니까? 자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이동의 자유부터 시작해 수없이 많은 자유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유는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정치는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억압되는 곳에서는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도 없습니다. 예컨데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개개인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 하지 못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개인이 잘못 이야기 했다가 감금되거나 구속되고, 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개개인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정치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정치적 자유를 얻느냐? 쉽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을 표현할 줄 알아야 되는데, 어떤 사람의 행위가 잘못 됐다고 여겨지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정한 직장에 속해 있는 개인이 직장상사가 부당한 것을 요구하거나 부당한 짓을 할 경우에 '옳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입니다.
확대하자면 집권자들의 잘못에 대해 잘못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때, 비로소 정치가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언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트럼프의 사례도 그렇습니다. 또 그렇지 않을때에도 무엇인가 잘못되면 언론이 언론 탓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언론이 잘못된 경우도 자주 있긴 하지만, 언론은 다양합니다. 집권세력에 가까운 성향의 방송이 있다면, 또다른 신문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선택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언론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는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개인이 스스로 챙길 때 주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혹자는 '나는 서초동에서 내 정치적 자유를 해소'했고, 다른 이는 '나는 광화문에서는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A. 광화문만 혹은 서초동만 있다면, 완전히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파시즘이 되는 것입니다. 전체주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갈라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개의 의견이 있는 거지요. '어떤 집단이 더 건강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 집단 내부에 다양한 비판적 의견이 있는가? 없는가?'가 핵심입니다. '내가 이 광장에 나오긴 했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등의 내부적 비판이 가능한 집단은 훨씬 더 건강한 곳입니다. 다양한 소리는 없고, 앞에서 외치는 구호를 그대로 따라서만 외치는 집단은 건강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Q. 당내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의원을 내치는 정당도 있는데...
A. 제가 보기에는 성숙하지 못한 겁니다.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당이 되려면 내부적 비판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포용할 줄 알아야한다고 봅니다. 특정 팬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내치는 경우인데,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의 지도자가 선명하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4.15총선이 지나고 나면 현재 표면에 등장한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집권세력만 하더라도, 내년이면 대선 이슈로 당내 차기 지도자들을 자유롭게 경쟁을 통해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차기 지도자 후보들이 다양한 이유로 제거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정 이념,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것이 좌지우지 되기에, 어떤 사람이 차기 지도자가 될지가 불투명 합니다. 각 당의 문제를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 주지 못하니, 결국 구 정치인들과 구 정치적인 자원을 가지고 이번 4.15총선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용인 개인 서재에서 인터뷰 중인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Q. 유권자의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정치 철학자로서, 기성세대 지성인으로서 어떤 제언을 하시겠습니까?
A.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야 하지요. 독일이 참 재밌는 것이 정당마다 '폴리티션 빌둥'이라고 정치적 교육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장학재단이 있어요. 사민당은 사민당에 가까운 재단이, 기민당은 기민당에 가까운 재단들이 있어 대부분 재단들에서 정치적 교육, 민주 교육을 시킵니다. 청소년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도 합니다. 예를 들어 테러가 발생하면, '테러리즘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테러리즘은 무엇인가?'를, 난민 사태가 등장하면, '난민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등을 놓고 여러 어젠다로 윤리적,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서 접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그냥 신문만 보고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깊은 내부성찰을 거친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는 겁니다.
독일의 정당들은 단순한 싱크탱크를 넘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히틀러의 나치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시민교육을 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되는 정치 자금을 유의미하게 쓰려면, 정당 별로 시민교육 기관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 건전한 판단을 돕고, 그 다음엔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늘려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번 4.15총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이 '정치엔 무관심하니 나는 투표 안 하겠다'라는 자세로 임하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라도, 정치적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여깁니다. 제가 독일에 있는 연구소 견학을 하고 이런 제도를 어떻게 도입할까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한국에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제대로 실행이 안되고 있습니다. 우선은 젊은 세대들도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자신들의 문제를 여론화, 이슈화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정치적 이슈가 나올 때마다, 정치적 시민교육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합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시작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100분 토론등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정치인들이 출연해 각 당의 입장만 대변하기 바쁩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는 겁니다. 정치적 시민교육이 일반화돼 윤리, 도덕, 정치, 사회적으로 성숙한 여론이 형성되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귀경하는 고속도로에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차츰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잠시 큰 호흡을 했다.
" 대중 사이에서 전체주의 운동이 성공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국가가 가진 두 가지 환상의 종말을 의미했다.
첫 번째 환상은 대다수 국민은 공공 업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또 모든 개인은 특정한 정당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환상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대중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또 그들은 정말 중립적이어서 국가의 정치적 삶에서 불분명한 배경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다."
라고 했던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한부분이 떠오른다.
4.15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대중들,
대한민국의 그 대중들은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할까?
코로나19로 심신(心身)이 지쳐가는 국민들에게 4.15는 어떤 의미일까?
아렌트가 말한 위 두 가지 환상이 깨어져 전 유권자들이 소중한 표심으로 의미있는 정책을 찾아
대한민국호가 더 나은 방향으로 물꼬를 틀 수 있도록 투표로 국민의 힘을 모으길 기원한다.
"마침내 우리의 배가 다시 모든 위험을 향해 출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그러한 '열린 바다'는 일찍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바다로 나가지 않고서는 우리가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없는 거죠.
다시 새로운 모험이 허락되었습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서도 기꺼이 삶의 의미를 읽어낸 철학자
니체의 '절대긍정'으로 이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진우 교수께서 인터뷰 내내 열정적으로 토로하신 정치 철학과
선진국의 정치 참여의 길이 한국사회에서도 조속히 현실화되길 기대한다.

[배양숙 글로벌 인사이트포럼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