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은행·증권 `다툼`에 막혀온 신탁개편…고령 투자자만 `봉`됐다
입력 2020-02-19 17:34 
◆ 한국은 '신탁' 후진국 (下) ◆
금융당국의 신탁에 대한 이중잣대와 은행권과 증권업계 간 밥그릇 싸움에 국내 신탁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고령자들이 신탁을 통한 노후 준비에 나서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일본 신탁법을 그대로 따라간 국내 신탁법은 2012년 개정 작업을 거치면서 좀 더 유연해졌지만 실제 신탁업을 규정하는 자본시장법(신탁업법과 통합)은 여전히 규제 일변도여서 신탁 시장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다.
또 고령자들에게 중위험·중수익을 안겨줄 수 있는 펀드식 운용의 신탁 시장(합동운용)이 증권업계 반발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고령자들 속을 타들어가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령자들이 계약 조건도 따지지 않고 파생결합펀드(DLF) 등 고수익 상품으로 몰리는 실정이다.
19일 신탁업계에 따르면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고령화와 초저금리 시대의 자산 관리 수단으로 신탁을 주목해 신탁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지만 국내 신탁은 관련 법이 상충하고 있어 신탁 대중화에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일본은 신탁업법을 개정해 수탁 가능한 재산 범위를 지식재산권이나 특허권 등으로 확대했다. 또 금융회사가 아닌 로펌 등도 신탁업을 할 수 있도록 영업 범위 제한도 철폐했다. 또 국내 자본시장법에 해당하는 '금융상품거래법'을 제정하면서 신탁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2006년에도 신탁법과 신탁업법을 개정해 세제 혜택이 있는 각종 신탁 상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반해 국내 신탁제도는 일본과 반대로 갔다. 1961년 일본 신탁법을 참고해 신탁법·신탁업법이 처음 시행됐지만 2009년 신탁업법이 폐지되면서 자본시장법에 흡수됐다. 2012년 신탁 재산 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신탁법 개정안이 시행됐으나 규제 중심의 자본시장법이 그대로 있어 아무런 실효성이 없었다.
신탁 내용을 정리하는 일반법인 신탁법에선 수탁 재산 범위에 제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행·규제를 담당하는 특별법인 자본시장법이 신탁 재산 범위를 열거된 재산으로 한정하면서 탄소배출권 등의 새로운 신탁업 수요 창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행 자본시장법 103조에 따르면 신탁업자는 금전, 증권, 금전채권, 동산, 부동산, 부동산 관련 권리(전세권·부동산임차권 등), 무체재산권(지식재산권 포함) 등 7가지 외 재산은 수탁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고동원 성균관대 교수는 "신탁법은 신탁 재산에 대한 제한이 없는 반면 자본시장법은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어 다양한 신탁 상품이 나오기 힘든 구조"라며 "신탁 때문에 자본시장법을 개정하는 것은 힘드니 신탁업법을 분리해 신탁 시장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초저금리 시대 돌입으로 은행들은 다양한 신탁 상품을 통해 비이자수익을 늘려야 하는 입장이라 신탁제도 개편이 초미의 관심사다. 앞서 김태영 은행연합회 회장도 "초저금리·고령화·저출산 등 뉴노멀 시대에 맞는 금융 상품 및 서비스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신탁업법상 '열거주의'보다는 '포괄주의'를 도입해 (신탁) 시장 파이를 키우는 게 좋다"고 강조한 바 있다.
최근 저수익 구조에 빠진 은행과 노후 대비가 필요한 고령자들에게 공통적인 관심사 중 하나는 '불특정금전신탁'이다. 이 신탁은 고객이 지정한 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돌려주는 특정금전신탁과 달리 은행이나 증권사 등 신탁업자가 주식·채권 등에 투자한 뒤 수익금을 되돌려주는 실적 배당 상품이다.
이 신탁에 대해선 증권사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증권사나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공모펀드와 유사한 형태를 띠지만 금융당국의 규제는 공모펀드보다 약해 투자 대상 선택과 운용이 더 자유롭다는 장점 때문이다.
2017년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은행권이 합심해 신탁제도 개편 및 신탁업법 분리를 추진했을 때도 불특정금전신탁 도입 여부가 논란이 되면서 증권사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바 있다. 증권업계는 은행이 불특정금전신탁 등 신탁업을 키워 최종적으로 자산운용업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증권업계의 강력한 반발에 불특정금전신탁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폐기됐다. 이후 신탁업법 분리 추진도 정권 교체기에 맞물려 우선순위에서 밀린 채 3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은행권에선 꾸준히 신탁업을 살려야 한다는 입장을 금융당국에 전달해왔다. 은행권은 고령자 등 소비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면 신탁을 통해 금융업 규모가 더 커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 <용어 설명>
▷ 불특정금전신탁 : 고객이 지정한 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돌려주는 특정금전신탁과 달리 증권사 등 신탁업자가 주식 등에 투자한 뒤 수익금을 되돌려주는 실적 배당 상품.
[문일호 기자 / 이새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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