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52시간제 탓에…싱가포르로 지점 옮길판"
입력 2020-02-17 17:24 
외국계 금융사 지점 고위직 A씨는 퇴근 후 집에 가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시차 때문에 본사 출근 시간에 맞춰 회의를 하려면 밤 12시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A씨는 "본사와 소통하기 위한 영상회의를 스마트폰으로 한다"며 "외국계 금융사 대부분은 밤이나 새벽에 회의를 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40대 직장인 B씨가 근무 중인 외국계 금융사는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후 전날 야근을 하면 그시간만큼 늦게 출근하는 식으로 근무 시스템을 바꿨다. 하지만 이는 '서류상' 근무시간일 뿐이다. B씨는 "IB(기업금융) 업무는 계약과 거래 중심으로 진행되고 개인별 스케줄이 다 달라 일률적으로 업무 시간을 적용하기 어렵다"며 "개인 실적을 고려하면 정해진 시간만큼만 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외국계 금융사들이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경직돼 있는 우리나라 근로제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전 세계에 지점을 두고 있는 외국계 금융사들로서는 한국 시장의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은성수 금융위원장과 외국계 금융사 CEO(최고경영자)들 간 비공개 간담회에서 한 참석자는 "굳이 서울에 지점을 둘 필요 없이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서 일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며 주52시간제에 대한 우려를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참석자는 "외국계 회사는 전문 인력들에게 다른 회사보다 두 배 많은 연봉을 주고 있다"며 "이런 고임금 인력은 다른 나라에서는 시간 제약 없이 일한다"고 지적했다. '금융 허브' '금융 중심지'를 외치며 우리나라 금융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노력도 이 같은 주52시간제 부작용 때문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양상이다.
외국계 증권사나 자산운용사는 주52시간제에 맞춰 근무 시스템을 바꾸긴 했지만 본사와 콘퍼런스콜을 하거나 외국 출장, 야간 고객 미팅 등이 많기 때문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는 2시간 늦게 퇴근하면 2시간 늦게 출근하는 등 퇴근한 시간에 따라 출근 시간을 지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 IB 업무가 개별 계약과 거래별 개인 스케줄에 따라 진행되는 만큼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시간 조정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 외국계 금융사 임원은 "주52시간제가 실제적인 업무 관행을 바꾸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금융사 대표나 지점장들은 지금처럼 근무 환경이 경직될수록 이미 금융 허브로 자리 잡은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외국계 금융사 지점장은 "홍콩이나 싱가포르만 해도 근무시간에 제약이 없다"며 "다른 나라에 비해 야근 수당도 많고 이제 주52시간제도 있으니 다른 나라 브랜치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외국계 금융사 직원은 주52시간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은 위원장은 "예외 조항이 많으면 법적 안정성이 저하될 우려가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면서도 "제도 정착 상황 등을 보며 고용노동부에 의견을 전달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현재 국내에서 영업하는 외국계 은행 지점(외은 지점) 중 상시 근로자가 300명을 넘어 주52시간제 규제를 적용받는 곳은 HSBC코리아 정도다. 당초 올해부터 50인 이상 사업장에 주52시간제가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정부가 1년간 계도 기간을 주기로 하면서 50~299인 기업은 의무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그러나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자율 기준에 따라 주52시간제를 의무화하고 있어 애로 사항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제윤 기자 / 정주원 기자 / 홍혜진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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