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여성을 전면에…극장가는 여성상위시대
입력 2020-02-05 14:25  | 수정 2020-02-05 14:3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근 5년 간 한국에서 개봉한 프랑스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극장가에 여성상위시대가 열렸다. 2017년 전 세계를 휩쓴 미투 열풍 이후 여성 서사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난 영향이다. 제작자와 배급사는 확실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는 여성 단독·집단 주연물의 제작에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지난 4일까지 한국서 관객 11만 6757명을 동원했다. 올 들어 개봉한 독립·예술영화 중 압도적 1위이며 근 5년 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끌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와 그의 결혼식 초상화를 몰래 그려야 하는 화가의 사랑을 담은 영화다. 결혼 상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인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기도 어려웠던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가 스크린 위로 명화처럼 펼쳐진다. 영화가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남성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AOA 설현, 배우 김향기, 러블리즈 지수 등이 관람을 속속 인증하면서 영화의 인기는 한층 더 타오르는 추세다.
`작은 아씨들`은 동명 소설 영화화 버전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제공 = 소니픽쳐스]
오는 12일 개봉하는 '작은 아씨들'은 루이자 메이 알코트의 동명 소설을 리메이크했다. 7번째 영화화인데, 이제껏 나온 영화 버전 중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레이디 버드'로 주목받은 여성 감독 그레타 거윅의 작품으로 각기 다른 꿈을 지닌 네 자매의 성장담을 담았다. 1860년대 나온 원작을 따뜻한 색감의 화면으로 포장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특징이다. 감독은 자매애를 강조하면서도 인간관계의 본질은 '갈등'에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여성 간의 연대에 집중하다가 주인공 간 마찰을 심는 걸 잊었던 '오션스8' 등에 비해 한 걸음 나아간 모습이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할리 퀸이 여성 히어로팀을 조직해 빌런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렸다. [사진 제공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히어로 물에서도 여성 주인공 활약이 눈에 띈다. 5일 관객과 만난 '버즈 오브 프레이'는 DC코믹스 캐릭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할리 퀸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조커와 헤어지고 방황하던 할리 퀸이 여성 히어로 팀을 만들어 악당 로만과 맞서는 과정을 그렸다. 'DC 확장 유니버스'(DC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슈퍼히어로 물)와 경쟁 관계를 형성하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는 오는 4월 '블랙 위도우'를 띄워 맞선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비롯한 다양한 마블 영화에서 주목 받았던 블랙 위도우의 숨겨진 스토리를 공개한다. 할리 퀸을 맡은 마고 로비와 블랙 위도우로 분한 스칼렛 요한슨은 각각 최정상급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로 둘의 흥행 대결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주디`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네이 젤위거(왼쪽)에게 17년 만의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사진 제공 = 퍼스트런]
이 밖에도 르네이 젤위거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긴 '주디', 샤를리즈 테론과 니콜 키드먼, 마고 로비가 뭉친 '밤쉘', 전쟁서 살아남은 두 여인의 삶을 다룬 '빈폴'이 올 봄 영화관에 걸린다.
`밤쉘`은 샤를리즈 테론, 니콜 키드먼, 마고 로비의 의기투합으로 관심을 모은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여성 주연물이 대세로 부상한 현상에선 2017년 '미투' 이후 바뀌어버린 문화산업 지형도가 읽힌다. 당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이 번진 뒤로 영화의 내용과 제작 양 측면에서 더 높은 여성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문화 수용자를 대하는 문화산업과 기업의 변화가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주로 남성 배우를 내세워 '이성의 관점에서 멋진' 캐릭터에 기반한 흥행을 노렸다"며 "지금은 콘텐츠의 주 소비층인 여성을 대상으로 제작하되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공감하게 하고, 대리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빈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두 여성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스토리를 담았다. [사진 제공 = T&L 엔터테인먼트]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여성주의를 다루는 방식이 보다 세련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작은 아씨들'은 공격적이기보단 낙관적이고 여유 있게 보인다"며 "이 영화는 주인공의 외롭고 연약한 부분도 노출하면서 '페미니즘 영화'가 모두 여성영웅주의처럼 그려지는 건 촌스럽다는 걸 이야기한 듯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관객도 이젠 (정치적)운동을 구색으로 넣었는지 도구로 넣었는지 아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김희애를 주연으로 내세운 한국영화 `윤희에게` [사진 제공 = 리틀빅픽처스]
한국에서도 지난해 '걸캅스'와 '82년생 김지영'으로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이 늘었으나 아직 영미권 영화계에 비해서는 제작 증가 속도가 느린 편이다. 최근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둔 작품 중에선 '성혜의 나라', '정직한 후보', '콜' 정도가 눈에 띈다. 김효정 평론가는 "한국은 전반적으로 주류 상업영화가 불안한 마당이라 여성 주연을 쓰는 건 리스크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며 "그럼에도 '윤희에게' '벌새' 같은 작품이 나오는 걸 보면 현재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한국도 드라마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무조건 예쁘다는 식으로 그리지 않고 있고, 오히려 미모에 초점이 너무 많이 맞춰진 여성 주인공은 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며 "반면, 영화계는 아직도 액션물이나 장르물에 멋진 남성을 등장시키면 흥행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어서 대작들이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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