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터뷰]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 "10·26사건은 사내정치에서 시작됐죠"
입력 2020-01-29 13:39  | 수정 2020-01-29 13:52
우민호 감독은 30대 내내 백수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소설과 영화를 접하며 세계관을 넓혀갔다고 했다. [사진 제공 = 쇼박스]

우민호 감독(49)이 상업영화 데뷔작 '파괴된 사나이'를 낸 건 2010년, 그의 나이 39살 때다. 일반 직장인의 사회생활 시작보다 늦었음은 물론이고, 현재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데뷔 나이보다도 5~10년가량 늦다. 최근 서울시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 공백기에 무엇을 했는지 물어봤다. "영화가 계속 엎어지더라고요. 공백기라기보단 백수의 시간을 보냈죠."
50대를 목전에 둔 우민호는 이제 관객들이 '믿고 보는' 연출자가 됐다.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 7일째인 28일 341만 관객을 넘으면서 손익분기점 500만명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역의 이병헌,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분한 이성민, 경호실장 차지철을 연기한 이희준까지 배우들의 연기 대결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다. 한국형 '대부'를 표방한 누아르 스타일의 연출도 칠흑 같이 어두웠던 시대상과 잘 어우러졌다는 호평이 자자하다.
조직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묵묵히 수행하다가 돌연 배신감을 느끼는 김 부장은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선우와 닮아 있다. [사진 제공 = 쇼박스]
그는 지금의 연출력을 갖는 데는 백수의 시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털어놨다. "불안했죠. 영화 한 편 못 찍고 인생이 끝나는 건가, 자격지심에 찌들기도 했고요. 그러다 책 한 권을 읽었거든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이었는데요. 그 책을 보면서 저는 '체념의 미학'을 배우게 됐습니다. 열심히 하되 때로는 '여기까지다'라고 내려놓을 필요가 있겠다고요. 그렇게 마음을 비웠더니 오히려 하나씩 작품 제작이 들어가더라고요."
독서와 영화감상으로 멘탈을 관리하고, 작품 세계의 토양을 다졌다. 소설가로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작가 존 르카레, '핏빛 자오선'을 쓴 코맥 매카시, '로드 짐'의 조세프 콘래드, 감독 중에는 장 피에르 멜빌, 마틴 스코세이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독에 집착하기 보다는 한 작품을 반복적으로 보며 깊이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같은 작품이라도 20대, 30대, 40대에 감상할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극장에서만 900만명 넘게 본 '내부자들'과 이번 '남산의 부장들', 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두 작품은 모두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충무로엔 여전히 영화 자체가 원작인 작품에 더 높은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훌륭한 논픽션과 소설, 만화를 리메이크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 속에 갇혀 있길 바라지 않았어요. '영화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화적인 확장성'을 갖게 되길 원했죠. 우리가 역사책만 봤을 땐 그냥 지나쳤던 인물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길 기대했습니다."
우민호 감독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를 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고 회상했다. [사진 제공 = 쇼박스]
그는 '남산의 부장들'이 권력자끼리 벌이는 '그들만의 투쟁'으로 보이지 않도록 연출했다. 그보단 관객이 직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직원 간 갈등처럼 비치도록 했다. 이병헌이 연기한 김재규가 조직의 톱니바퀴 속에서 묵묵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쪽이라면, 이희준이 분한 차지철은 본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상사를 치켜세우고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인물이다. 40년 전에 발생한 최고 권력자 살해 사건은 종종 유치하게까지 보이는 사내정치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직장이 아니라 친구들끼리도 이런 갈등을 경험할 수 있거든요. 둘이서 친하다가 갑자기 셋이 되면 관계의 균형이 어긋나게 되잖아요. '두 사람이 나만 빼놓고 노는 것 같네' '나보다 쟤랑 더 친해져버린 것 같네' 라는 식으로요. 결국 10·26도 인간 간의 갈등, 오해, 배신에서 비롯됐다는 거죠."
40대가 된 이후에도 그의 연출력은 꾸준히 향상돼 왔다. '간첩'(2012)에서 '내부자들'(2015)로 오는 동안 비약적 발전이 있었고, '마약왕'(2018)에서 보였던 약점을 이번 '남산의 부장들'에서 극복한 것이다.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영화가 흥행하든 안 되든, 전작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대답했다.
"제가 상업영화를 시작하는 데 10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이후엔 운이 좋게도 영화를 계속해서 찍을 수 있었거든요. 영화를 찍는 동안엔 궁극적으로 연출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죠. 한 작품, 두 작품, 다섯 작품을 하면서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해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감독에게 가장 좋은 수업은 단편이 됐든 장편이 됐든 지속적으로 찍어보는 거예요."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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