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한다지만 그 속도는 시대마다 달랐다. 빠르거나 느린 시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퇴보할 때도 있었다. 2020년은 어떨까. 새해 벽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든 생각은 '변곡점은 이미 지나쳤다'는 것이다. 혁신의 굴곡이 뚜렷한 방향을 잡고 확 치솟았단 의미다.
5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가스 한복판에 자리 잡은 컨벤션센터(LVCC) 모노레일 역에 내리자 수천명의 기술자들이 작업에 몰두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틀 후인 7일부터 열릴 CES 2020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가배지를 받는 등록대에는 '안면인식을 통해 배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써 있었고, 주요 전시장에는 관람객들을 깜짝 놀라게 할 프로토타입(시제품)들이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CES 2020의 공식 미디어 파트너사인 매일경제는 미리 LVCC 내부를 둘러보며 전시기업들의 기술 트렌드를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CES 주요 전시장인 노스홀, 센트럴홀, 사우스홀, 웨스트게이트 등을 돌아보며 파악한 참여기업들의 전시 트렌드는 명확했다. '일상으로 들어온 신(新)기술'이었다.
드론과 자율주행차, 블록체인, AI(인공지능) 등이 일상과는 아직 멀리 떨어져있는 미래기술로 여겨졌던 것이 불과 2~3년전이다. 올해 CES에 참가한 기업들은 이들 기술들을 누구나 쓸 수 있는 범용기술인양 '상상의 영역'이 아닌, 일상의 변화로서 어필하고 있었다. '기술의 우월성'보다 '일상생활에서의 쓰임새' 중심으로 전시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은 기술을 통해 이제는 실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실적을 쌓을 때가 됐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 했다.
산업기술의 변곡점, 분수령을 운운할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가공할 속도로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는 일만 남았음을 CES는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다.
2010년대에 공을 들인 5G 통신과 자율주행차 기술은 2020년대 시장에서 만개할 것이다. CES 주최 측이 7일 발표할 자료에 따르면 AI와 사물인터텟 등이 융합된 스마트홈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0년 51억 달러로 전년대비 12.8% 급증할 전망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서비스들이 일상에 마구 침투할 것이다. 예컨대 아마존은 디지털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새로운 차량 구매 서비스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차를 사려면 실제로 차량을 타 보기 위해 매장을 방문해야 하고, 딜러들마다 제각각인 가격흥정을 거쳐야만 하는 등 수많은 절차들이 있다. 그러나 아마존은 매장에 가지 않고도 차량을 구경할 수 있는 가상현실 기술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개인맞춤형 차량 옵션 구성 등을 통해 몇시간 만에 차량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전시하려 하고 있었다.
구글도 메인 전시장 바깥에 2층으로 구성된 전시장을 마련하고 미끄럼틀 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외신 관계자들은 인공지능 음성비서인 '구글 어시스턴트'를 활용해 다양한 생활 속 편리함을 더해 줄 수 있는 기술들이 전시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CES의 주인공 격인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단순히 TV 등과 같은 가전제품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이들 가전제품이 우리 삶을 어떻게 더 편리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한 모습을 전시하는데 역점을 두는 모습이었다.
김현석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부문장(사장)은 CES 2020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서 '경험의 시대'를 선언할 예정이다. 맞춤형 기술로 개개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경험을 고객에게 선사하겠다는 것이다. LG전자는 센트럴홀에 "모든 곳이 집이다"(Anywhere is Home)라는 광고문구를 전시했다. '씽큐'라는 인공지능 연결기능을 통해 세탁기로 TV와 냉장고를 컨트롤하고, 직장에서 집에 있는 세탁기를 컨트롤하는 등 모든 가전이 AI로 연결된 세상을 전시할 예정이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한발짝 더 다가오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래기술의 격전장인 모빌리티 분야에선 그야말로 치열한 격투기가 벌어질 전망이다. 현대차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운송수단을 통해 여러 구간들을 이동할 때 얼마나 시간이 단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직접 보여줄 도심 항공 모빌리트(UAM)은 현지에선 벌써부터 화제였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라는 한국 속담이 CES에서 구현되는 셈이다. 이 밖에 델타 항공의 CEO인 에드 바스티안은 한국시간으로 8일 오후 4시경에 기조연설을 진행하는데, CES 행사 주최 측에 따르면 안면인식 기술 등을 활용해 티켓팅 없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는 편리한 환경 등을 소개할 전망이다.
서울대 출신 자율주행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의 전수진 이사는 이날 CES 전시장에서 매일경제와 만나 "이번 CES 전시에는 차량 뿐만 아니라 해양선박, 농기계, 항공기 등 다양한 모빌리티 회사들이 나온다"며 "자동차 뿐만 아니라 비행기,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이 디지털로 연결되는 트렌드를 이번 CES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에 호평을 받았던 '벨'(BELL)의 하늘을 나는 운송수단인 '컨버터플레인' 역시 업그레이드된 시제품을 전시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일본의 혼다 자동차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사람들이 편리하게 운전을 진행할 수 있는 '증강주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을 예정이다.
지난 10년간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기술들은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년간은 디지털을 알았다면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 10년간은 디지털을 모르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여담 몇 가지를 보태자면 라스베가스 어디서나 마주쳤던 중국인들은 예전에 비해 숫자가 확 줄었다. 전시장 주변은 물론이고 공항, 시내거리에서도 존재감이 뚝 떨어졌다. 중국 IT의 간판스타 화웨이마저 전시규모를 축소했다. 올해 CES 참가자 숫자가 작년(18만3000명)보다 1만명 가량 감소한 것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중 무역분쟁의 또 다른 파편이다.
사실 CES를 민간의 기술전시회로만 여기는 것은 순진한 시각이다. CES에서도 정치의 영역은 점점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영애 이방카가 오는 7일 '기술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선 대선 잠룡으로 꼽히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원희룡 제주지사가 CES현장으로 달려간다. 국가 미래설계의 단초를 찾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찬 CES 현장에선 모든 게 희망적이다.
[라스베이거스 = 이진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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