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카스, 하이트를 앞세운 국산 맥주의 화려한 시절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1만원 4캔'으로 무장한 수입맥주에 빠르게 시장을 내주면서 이젠 수입맥주 '전성시대'다. 실제 지난 2014년만 해도 6.7%에 불과했던 수입맥주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17.5%로 3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연간 수입액은 8181억원으로 불어났다.
새해 들어 이런 판도에 변화가 나타날 조짐이다. 국내 캔맥주 출고가격이 일제히 인하됐다. 500㎖ 캔 기준 클라우드는 1880원에서 1565원으로 315원(17%) 낮아졌다. 한달뒤면 소비자가격에도 반영된다. 국산 캔맥주가 이처럼 몸값 낮추기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술에 붙는 세금 체계가 반세기만에 바뀌기 때문이다.
5일 국세청에 따르면 술에 붙는 세금인 주세가 1일부터 개편됐다. 종전까진 주류 가격에 따라 세금을 매기던 '종가세'를 적용했지만 올해부턴 주류의 양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는 '종량세'를 도입한 것이다. 맥주와 탁주(막걸리)가 그 대상이다. 지난 1968년 이후 52년만의 변화다. 지난 1949년 조세법 제정 시에는 종량세였다가 주류소비를 억제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1968년 종가세로 전환됐는데 이번에 다시 일부 주종에 대해 종량세로 돌아간 것이다.
술은 담배와 마찬가지로 세금에 사회적비용에 대한 대가가 포함돼 세율이 높다. 맥주, 소주, 위스키 등은 무려 72%다. 과실주, 청주 등은 30%이고 탁주는 5%다. 여기에 교육세(최고 30%)까지 붙는다. 납부세액만 지난해 기준으로 맥주 1조 5814억원, 소주(희석식) 1조 2230억원에 달한다.
막대한 세금을 소비자 가격에 반영하는 맥주업체 입장에선 기존 '종가세'로는 수입맥주와 애초에 경쟁이 안되는 구조였다. 국산 맥주는 출고가격이 과세표준인데 수입맥주는 수입신고 가격을 기준으로 한다. 제조원가는 물론 판매관리비와 이익까지 과세표준에 포함되는 국산맥주와 달리 수입맥주는 수입가액과 관세만 포함된다. 판매관리비, 이익 등은 과세 대상이 안되다보니 가격경쟁력에서 국산맥주는 따라잡을 엄두조차 못낸 것이다. 강상식 국세청 소비세과장은 "주세 차이가 국내와 수입맥주간 제품가격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종량세가 적용되는 맥주와 탁주는 주류 가격이 다르더라도 같은 주종이고 같은 양을 출고했다면 세금이 똑같게 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기존 종가세로 ℓ당 1121원이던 캔맥주 주세는 종량세 전환뒤 830원으로 291원이나 줄어든다. 교육세 등까지 포함한 총 세부담은 종전 1758원에서 1343원으로 415원이나 감소한다. 원가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던 캔용기 제조비용 등이 과세표준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격인하로 이어질 전망이다.
대량 생산이 어려워 제조원가가 높은 탓에 주세 비중이 높았던 수제 맥주도 이번 종량세 전환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병맥주와 페트맥주는 세금 변화가 크지 않아 소비자가격에도 큰 영향이 없을 전망이다. 다만ℓ당 815원이던 세부담이 1260원으로 445원이나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생맥주는 출고가격이 오르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는 2년간 생맥주 주세를 20% 경감해줄 방침이다.
탁주는 기존에도 세율이 5%로 낮은 수준이어서 종량세 전환에 따른 가격영향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고가 포장재를 사용하는 고급 탁주는 앞으로 용기비용이 과세표준에서 제외되면서 세부담도 줄어들게 된다. 고급 원재료를 사용하면서 가격을 올려도 세부담은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제품 고급화,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 탁주업체 A사의 경우 종량세 전환으로 일반 탁주는 1병당(출고가 1000원) 세금이 21원 감소하는데 그치지만 고급 탁주(출고가 1만 5000원)는 무려 729원이나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향후 소주, 위스키 등 다른 주종에 대한 종량세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30개국이 종량세를 채택하고 있다. 호주와 터키가 한국처럼 종량세와 종가세를 병행하고 있고 종가세만 적용하는 나라는 멕시코와 칠레뿐이다.
[임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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