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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현장 직원까지 주52시간 적용…공사기간 평균 4개월 더 걸려
입력 2019-12-11 18:04  | 수정 2019-12-11 19:53
◆ 건설사 해외수주 최악 성적표 ◆
동남아시아에서 화공 플랜트를 짓고 있는 대형 건설사 직원 A씨는 요즘 아침마다 설계도면을 따로 프린트해 두는 게 일이다. 한창 일에 집중하다가 시스템이 꺼지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7월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해외 현장에도 적용돼 컴퓨터 업무 시스템이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만 작동된다. 현장 외국인 노동자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프로젝트 '브레인' 격인 설계 담당자는 최신 3차원(3D) 설계 시스템이 꺼지면 20년 전처럼 연필로 도면을 그려 가며 점검해야 한다. 4년 전 수주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라 프로젝트 마무리가 다가올수록 혹여 지체보상금을 내게 될까 봐 걱정이다.
탄력근로제를 현 2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통과는 불투명하다. 이에 따라 해외건설협회 등은 지난해 7월 이전 발주 공사는 주68시간을 기준으로 공정 계획이 수립됐으므로 신뢰 보호 차원에서 종전 규정을 적용하는 특례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가뜩이나 체력이 약화된 국내 건설업계는 고질적인 생산성 저하에 각종 규제까지 겹쳐 삼중고 신세다. '탈원전' 정책은 물론 플랜트와 토목 공사를 터부시하는 현 정부 기조로 인해 가뜩이나 경쟁력이 떨어져 가는 해외 수주를 본사에서 적극 지원하는 노력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한 건설사 임원은 "노조가 강하다 보니 국내 건설사 대졸 초임이 일본보다 높지만 생산성은 턱없이 떨어진다"며 "일본이나 유럽 건설사와 인건비 경쟁도 안되고 금융 지원도 열악하니 일을 더해도 모자랄 판에 근무시간까지 규제를 받게 돼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고 토로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올 초 42개 해외건설현장 근로시간 단축 현황을 조사한 결과 투입인력이 증가했다는 응답이 48%나 나왔다. 원가상승으로 경쟁력이 저하된다는 의미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주52시간 근무제를 적용했을 때 B사의 경우 현장 30곳에서 공사 기간이 평균 4.2개월 더 소요되고, 공사 기간 지연 시 현장 1곳당 156억여 원에 달하는 지체보상금이 발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맥킨지글로벌연구소(MGI)의 '글로벌 건설업 혁신 보고서'(2017)에 따르면, 우리나라 건설업의 노동시간당 부가가치는 13달러로 벨기에(48달러), 네덜란드(42달러) 등 유럽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사우디아라비아(14달러)보다도 못했다. 전 산업 대비 건설업의 노동생산성 성장률도 41개국 중 40위로 꼴찌 수준이다.
중국 등 후발 주자와 저렴한 시공비로 단순 도급하는 수주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설계·엔지니어링·조달 프로세스 표준화 등을 통해 선진국형 수주 전략을 짜는 방식으로 체질을 개선해온 곳들만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수주 1위 업체인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 11월까지 해외 수주 37억달러를 기록했다. 2017년 49억달러, 2018년 50억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장 다변화 성과가 나온 점은 긍정적이다. 이 회사는 최근 러시아 메탄올 플랜트 기본설계를 따내 해외 선진 기업이 독점한 고부가가치 분야에 진출했다. SK건설이 따낸 영국 실버타운 터널 프로젝트는 국내 건설사 최초로 서유럽 지역에서 추진하는 인프라스트럭처 민관협력형(PPP) 사업으로 주목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과거만 해도 건축사업부와 주택사업부가 별도 조직인 경우가 많았으나 해외 플랜트 저가 수주 경쟁 여파로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건축사업부가 주택사업부 아래로 들어가는 조직 개편도 많았다"며 "해외 수주를 위한 새로운 공법 개발이나 정보기술(IT) 투자 등 장기적 비전이 없는 와중에 후발 국가들이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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