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해가 뜨기도 전인 아침 7시께부터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들이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 줄을 섰다. 화폐박물관은 아침 10시에 개관하는데 3시간 전부터 쌀쌀해진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줄을 선 것이다. 이들이 줄을 선 이유는 7400원짜리 한국은행 주화세트다. 한국은행 주화세트는 500원, 100원, 50원, 10원짜리 동전과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5원, 1원짜리 주화가 한 세트로 구성돼 7400원에 판매된다. 이 주화 세트는 현장판매 기간 명동과 남대문 상인들에게 2만원이 넘는 값에 팔린다. 이로 인해 현장판매 기간 동안 서울 중구 화폐박물관 앞은 북창치안센터 골목 안까지 150m 넘게 노인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한국은행이 매년 판매하는 주화세트가 사재기 수요로 인해 현장판매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한은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내 기념품가게 운영을 대행하는 서원기업(대표 손민호)은 이달 2일 시작한 기념주화 2차판매에서 현장판매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념주화 현장판매를 중단한 것은 2001년 사업 시작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공식적인 현장판매 중단 이유는 추운 날씨와 한국은행 본관 리모델링 공사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현장서 판매되는 기념주화 세트가 웃돈을 노린 사재기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통화정책을 주관하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주화세트가 '되팔기'를 통해 지하시장으로 흘러간다는 오명도 부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0월29일부터 11월5일까지 진행된 1차 판매 기간, 노인들은 매일 아침 7시부터 줄을 섰고, 이들에게서 주화세트를 구매하려는 호객꾼도 화폐박물관 인근을 떠돌았다.
2019년 한국의 주화 세트. [사진 제공 = 서원기업 쇼핑몰 홈페이지]
아침부터 줄을 선 이들을 실수요자가 아닌 되팔기 수요로 의심하는 이유는 온라인 재고와 현장 재고가 따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온라인 판매는 실수요자만 구매할 수 있도록 1인당 3세트까지만 판매하는 반면 현장판매는 개인정보보호법상 구매정보를 보관할 수 없어 다음날 찾아오면 또 3세트를 구매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 재고소진으로 현장판매가 중단된 지난달 6일에도 여전히 대행사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주화세트 재고가 남아있었다. 현장서는 150m씩 줄을 서지만 온라인에는 재고가 남아도는 모순이 펼쳐진 것이다.실제 매일경제가 현장을 찾아 매매를 시도해보니, 현장판매가 끝난 6일 기준 제일은행 옛 본점(제일지점) 앞에서 2019년 주화세트를 3만8000원에 매입하겠다는 매매상을 만날 수 있었다. 화폐박물관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주화세트 가격이 다섯배로 폭등하는 셈이었다.
이들의 주화세트 구매로 인해 화폐박물관이 사실상 마비되는 것도 문제다. 현장 경비 관계자는 "아침 일찍부터 주화세트 구매 줄이 길어지면서 박물관 관광객들이 길에 막혀 박물관 관광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막무가내로 의자나 물을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등 현장 관리에 어려움도 있었다"고 하소연했다. 한은은 이들을 도로가에서 보호하기 위해 분리 펜스를 설치하는 등 노력했지만, 현장 경비인력이 몇명 되지 않아 일손이 달렸다.
주화세트로 인해 지하경제가 양성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공식적인 판매경로를 통하지 않은 사재기 수요가 유통 가격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2014년까지 5만세트만 판매하던 것을 올해 14만세트까지 늘렸다"며 "2일부터 시작한 온라인 판매한도도 1인당 5세트로 늘렸다"고 밝혔다. 공급량을 늘려 재판매 가격을 떨어트리고 이를 통해 사재기를 막아보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이 효과적일지는 2일부터 시작된 2019년 2차 판매 추이를 살펴봐야 할 전망이다. 한은은 판매 추이를 지켜본 뒤 내년 주화 판매량을 결정할 전망이다.
[송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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