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이거나 임신 경험이 있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 10명 중 7명 이상이 임신 중 유해물질을 다뤄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의 73%가 소속 기관에서 임산부를 위한 실험실 안전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답했다. 특히 대학원생 등 직급이 낮은 연구자일수록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와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2일부터 31일까지 국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 공공연구기관, 기업 등의 임신 중이거나 임신 경험이 있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 4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응답자의 소속 기관은 대학(54%), 기업(23%), 공공연구기관(21%) 순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6%가 '임신 기간 중 유해물질을 다뤄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이 같은 경험은 직급이 낮을수록 더 높게 나타났다. 교수·책임연구원의 경우 전체의 50%가 임신 중 유해물질을 다뤄 본 경험이 있다고 답한 반면, 대학원생의 경우 전체의 84%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가운데 전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66%는 '실험 환경에 노출된 상황에 임신한 것을 후회했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실험실 환경이 태아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걱정'이 77%로 가장 많이 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실이 안전 관리에 취약한 것으로 파악됐다. '소속 기관에서 임산부를 위한 실험실 안전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답한 연구자는 전체 응답자의 73%에 달했다. 또 전체 응답자의 97%는 '임산부용 실험복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8%는 '연구실에 임산부 연구자를 위한 실험복, 고글, 마스크 등 보호 장비가 구비돼 있지 않다'고 답했다. 이 같은 보호 장비가 '어느 정도 구비돼 있는 연구실'은 29%, '잘 구비돼 있는 연구실'은 13%에 그쳤다. 특히 박사후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이 임신했을 당시 연구실에 관련 보호장비가 구비돼 있지 않은 경우가 각각 60%, 63%로 높게 나타났다.
임산부를 위한 연구실의 배려도 저조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에 해당하는 임산부는 하루 2시간씩 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임신으로 인해 육체노동을 줄였거나 줄일 예정'이라고 답한 연구자는 전체의 34%에 불과했다. 이 경우 역시 직급별로 편차가 크게 나타났는데, 교수·책임연구원의 경우 63%가 육체노동을 줄였거나 줄일 예정이라고 답했지만 박사후연구원과 대학원생의 경우 각각 35%와 24%에 그쳤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임신을 인지한 뒤 즉시 알렸다'는 응답자는 34%(139명)에 그쳤다. 즉시 알리지 않았다는 연구자(263명) 가운데 34%는 '굳이 빨리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답했고, 25%는 '불필요한 시선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꼽았다. '연구실 동료에게 부담을 줄까봐'(20%), '실험에 차질이 생길까봐'(12%), '해당 실험 또는 직무에서 배제될 것이 두려워서'(10%) 등이 뒤를 이었다.
브릭과 ESC 젠더다양성위원회는 "이번 설문 조사를 통해 임산부를 위한 정부 정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소속기관 차원에서 임산부 연구자들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히 직급에 따른 차별없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 주최 측은 글로벌 생명과학기업 머크의 후원을 받아 임산부용 실험복 300벌을 제작해 무료로 배포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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