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주하의 9월 23일 뉴스초점-누명 쓴 시민들, 누가 사죄를?
입력 2019-09-23 20:08  | 수정 2019-09-23 20:38
6년간 10명이 살해되고 200만 명 이상의 경찰을 투입했지만, 모방 범죄까지 발생한 국내 최악의 미제 사건.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아직 범인이 검거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수사 기법과 행정 등 1980년대 우리 경찰과 사회를 여실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특정된 용의자만 무려 2만 천 명. 화성 일대를 배회했다는 이유만으로 검거되거나,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지목돼 조사를 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한 교회 전도사는 교회 지을 땅을 알아보려고 화성 일대를 돌아다니다 여성에게 길을 물어본 게 화근이 돼 수사를 받기도 했죠.

이들 중 일부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닷새 동안 잠도 못 자고, 맞고, 발가벗겨지는 혹독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까지 3년 동안 교도소에서 누명을 견뎌야 했죠. 급기야 정신질환을 앓던 한 남성은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석방된 뒤 정신분열 증세가 악화돼 열차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들뿐 아니라 그 유가족도 이런저런 소문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죠.

무분별한 검거와 강압수사, 폭력, 허위진술 유도 등으로 고통을 당한 이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경찰과 대중이 모두 범인 검거에만 관심을 두는 사이에 말이지요.

물론 과학수사 기법이 미진했던 시절, 현장을 수색하거나 감각으로만 수사를 해야 했던 당시 수사관들의 고충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또 위에서 소위 '쪼니까', 국민이 불안해 하니까라는 이유로 확실한 증거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용의자를 만들고 강압 수사한 것까지 모두 이해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당시 억울한 용의자들을 대변했던 한 변호사는 혹시라도 자신이 변호한 이가 진범은 아니었는지 지금까지 걱정을 해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변호한 이도 완전히 믿지 못할 정도이니 용의자가 된 이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오죽했겠습니까.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잊혀지려면, 아니 완전히 해결되려면, 최근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의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29년간 그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는 억울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용의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 역시 마무리돼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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