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성범죄 피해자와 피해 사실을 전해 들은 제삼자로부터 확보한 진술만으로 유죄가 확정된 것은 대법원의 확고한 법리로 자리 잡은 '성인지(性認知) 감수성' 원칙 때문으로 평가됩니다.
성인지 감수성 원칙은 성문제 관련 소송을 다루는 법원은 양성평등의 시각으로 사안을 보는 감수성을 잃지 말고 심리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작년 1월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사실을 드러낸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이후 사회 전방위로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한 이후 사법부는 성범죄 관련 재판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 원칙을 견지할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안 전 지사의 재판에서는 그가 수행비서 김지은 씨를 4차례 성폭행하고 6차례에 걸쳐 업무상 위력 등으로 추행한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김 씨의 진술과 김 씨로부터 피해사실을 전해 들었다는 안 전 지사의 전임 수행비서 등의 진술 정도였습니다.
안 전 지사의 범행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물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진술의 신빙성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지가 재판의 쟁점이 됐습니다.
1·2심에서 진술 신빙성을 판단하는 데 적용된 법리가 바로 '성인지 감수성' 원칙이었습니다.
1심은 "진술에 다소 모순이나 비합리성이 있더라도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면서도 범행이 발생한 당일 저녁 김 씨가 안 전 지사와 와인바에 동행한 점 등을 들어 김 씨의 진술을 믿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2심은 "김 씨가 범행을 폭로하거나 수행비서로서의 업무를 중단하지 않고서 그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해서 그러한 행동이 실제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는 할 수 없다"며 김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1·2심 모두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적용해 판결을 내렸지만, 2심 재판부가 좀 더 폭넓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 같은 2심의 판단은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안 전 지사 측이 피해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피해자 등의 진술은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며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며 김 씨의 무고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대법원은 더 나아가 안 전 지사가 범행 당시 도지사의 위력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성인지 감수성 법리에 따라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무형적 세력에 해당한다"며 "간음행위 또는 추행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간음행위 또는 추행행위 직전·직후 피고인과 피해자의 태도 등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은 업무상 위력으로써 피해자를 간음 또는 추행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대법원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법조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이 구체적이지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앞서 안 전 지사의 1·2심 재판부 모두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해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거쳤는데도, 성범죄 피해자로서의 김 씨 행동을 두고는 현저한 입장 차를 보인 점은 성인지 감수성 개념의 추상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 전 지사 사건을 계기로 다소 불명확한 개념인 성인지 감수성 법리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법조계에서 제기됩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