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020년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원정출산'을 언급하며 미국의 '출생 시민권 제도'를 폐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혔다. 정치적 지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이른바 '캐러밴'(멕시코를 통과해 미국으로 향하는 중미 3국 출신 이주민 무리)을 겨냥해 한 말으로 풀이되지만 한국에서도 교수와 정치인, 기업인 등이 자녀가 미국 시민권을 갖도록 하는 원정 출산을 학업·취업·병역 문제에 이용해 고질적인 논란이 된 바 있어서 트럼프 대통령 발언이 눈길을 끄는 모양새다.
현지 폭스뉴스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참전용사 단체 행사 연설을 위해 켄터키주로 떠나기 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출생 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은 웃기는(ridiculous) 정책"이라면서 "우리는 그 제도를 매우 매우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생 시민권은 '속지주의 시민권'으로도 불리는데,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모 국적과 별개로 태어난 나라 국적도 인정해 주는 제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출생 시민권이란 게, 우리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인가? 당신이 국경을 넘어들어와서 애를 낳으면 '축하해요, 이제 아기는 미국 시민이네요'라고 하는 것"이라고 비꼬아 말했다. 이어 "우리는 그것을 정말 정말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웃기는 일"이라면서 출생시민권 제도를 손 볼 수도 있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이 발언은 사실 캐러밴을 겨냥한 것이다. 캐러밴이 임산부 등 가족단위로 멕시코 접경지를 통해 미국으로 넘어들어오는 것을 비난함으로써 반(反)이주 정책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한 발언으로 보인다는 것이 현지 언론 분석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같은 해 10월 악시오스 인터뷰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출생 시민권제 폐지를 주장했다. 당시 그는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불법 이주의 닻을 올리는 아기들(앵커 베이비·anchor babies)"이라고 하면서 대통령 행정명령을 통해서라도 제도를 중단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왔다고 폭스뉴스가 전했다. 당시 앵커 베이비는 정치적 '증오'를 암시하는 단어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실제로 출생시민권제가 폐지될 지는 미지수다. 이 제도는 미국 이민국적법(INA)과 수정헌법 제14조에 기반하기 때문에, 특히 최상위법인 헌법을 바꾸지 않는 한 행정명령으로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법적으로 힘들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스 폰 사스파코프스키(Hans von Spakovsky) 헤리티지 재단 법률고문은 "14조상 '관할권'을 물리적인 영토를 기준으로 하느냐,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느냐의 문제까지 감안해야 한다"고 폭스뉴스 인터뷰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수정헌법 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미국 '관할권(jurisdiction)'에 속하며,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한다.
미국 불법이주민 구금시설 풍경.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한편 21일 트럼프 행정부는 어린이를 포함한 불법 이민자 가족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 규정을 발표했다. 케빈 매컬리넌 미 국토안보부(DHS) 장관 대행은 "이번 조치는 플로레스 합의 핵심 구멍을 막음으로써 미국 이민 시스템을 완전하게 회복하려는 것"이라면서 "새 규정은 60일 안에 시행될 것이며 체류 허가가 나올 때까지 불법 이민자 가족을 미국 정부가 구금할 수 있다"고 밝혔다.'플로레스 합의'는 1997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만들어진 관습법이다. 합의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불법 이주민 어린이들을 20일 이상 구금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불법 이주자 부모와 어린 자녀들을 격리 구금하는 행정명령을 냈다가 국내·외 비난이 빗발쳐 정치적 지지도가 떨어질 위기를 맞자 철회한 바 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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