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덕투일치, 덕질에 재테크하는 2030…덕 보는 크라우드 펀딩
입력 2019-08-12 16:45  | 수정 2019-08-12 17:46
<에릭 요한슨 사진展>은 와디즈에서 진행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9억원 이상의 금액을 모집했다. [사진 출처 = 에릭 요한슨 사진전 홈페이지 캡처]

"덕후의 마음으로 투자한 거죠."
평소 전시회를 즐겨 찾는 취준생 이진혁(28) 씨는 와디즈에서 열린 '에릭 요한슨 사진전(展)' 펀딩에 20만 원을 투자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전시회를 내 돈으로 열 수 있다"는 생각에 투자를 결정하기까지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무료 입장권 1장과 연이율 10%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도 투자 결정에 영향을 줬다. 어차피 관람하려고 마음먹은 전시인데, 공짜로 입장하고 이자까지 받는다면 그야말로 이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시회가 끝나는 오는 9월까지 방문한 관람객 수에 따라 추가 금리를 받는 옵션도 마음에 들었다.
이 씨와 같은 20~30대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덕투일치' 바람이 불고 있다. 덕투일치는 '덕질과 투자가 일치한다'는 뜻으로, 관심 있는 분야에 과감히 투자한다는 요즘 트렌드다. 투자에 대한 보상이 금전적 수익에 그치지 않고 제품과 서비스, 개인의 만족감 등이 뒤따른다. 취미 활동을 하면서 일종의 재테크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덕후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 씨는 "덕질하는 분야인 만큼 최신 정보와 유행에 민감한 편이다"며 "취미 분야에 대해서는 마치 전문가처럼 상품과 시장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덕후의 마음이기 때문에 만약 투자가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 영화 등 크라우드 펀딩의 영역이 점차 확장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텀블벅 홈페이지 캡처(왼쪽), 와디즈 홈페이지 캡처(오른쪽)]
덕투일치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곳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다. 크라우드 펀딩은 일반 대중에게 투자를 받아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는 텀블벅과 와디즈 등이 대표적이다. 텀블벅은 지난 2011년 설립된 국내 최초 후원형 펀딩 플랫폼으로, 지금까지 70만명 넘는 이용자가 2만 여개 프로젝트에 7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했다. 누적 모집금액은 지난 2016년 100억원 돌파를 기점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는 중이다. 증권형 펀딩에 특화된 플랫폼 와디즈는 매월 600~700개 프로젝트를 오픈해 올 상반기에만 656억원을 모집했다. 2012년 설립 이후 모집금액 규모가 매년 2~3배씩 성장했으며, 7년간 누적 펀딩 금액만 약 1800억원이다.
덕질 세계가 넓은 만큼 크라우드 펀딩 영역도 점차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출신 가수 김예림은 림 킴(Lim Ki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신곡을 발매하기 위해 텀블벅을 찾았다. 그의 음악을 지지하는 팬들은 이번 앨범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대중 투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와디즈는 국내 영화 기대작 '사자' '천문'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 마니아 및 출연 배우 팬들은 관람객이 아닌 투자자로서 작품 제작 과정에 함께할 수 있었다.
덕투일치 트렌드는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맞물려 있다. [사진 출처 = 그린플러그드 서울 홈페이지 캡처(왼쪽), 네이버 영화 홈페이지 캡처(오른쪽)]
밀레니얼 세대가 덕투일치에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관심 분야에 대한 소액 투자로 꽤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대 초반 프리랜서 강 모 씨는 지난 1월 와디즈에서 진행된 '그린플러그드 서울 2019' 펀딩에 100만원을 투자했다. 그는 보상으로 5만 5000원 상당 티켓 1장과 백팩, 손수건 등이 포함된 굿즈 한 세트를 받았다. 페스티벌 현장 한편에는 강 씨 이름이 새겨진 투자자 포토월이 세워졌고, 투자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특별 라운지도 마련됐다. 또 5개월 만에 세전 14% 정도 수익도 올렸다. 기회비용 대비 심리적·물질적 만족감을 다방면으로 충족할 수 있는 '가심비(가격대비 마음의 만족도)' 있는 투자였던 셈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일명 '소확행'을 얻기 위해 덕투일치가 확산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20대 중반 대학생 이 모씨는 ▲웹툰 단행본 ▲게임 OST 앨범 ▲그림 자료집 ▲스케치 업 파일 등 취미와 관련된 펀딩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다. 그는 "지갑 사정만 괜찮다면 소확행 있는 펀딩에는 나서는 편이다"고 말했다. 덕질을 위해 투자하는 펀딩이라면 최소한 기쁨은 분명히 보장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심을 소비·투자로 표출하는 밀레니얼 세대 특유의 '미닝아웃'(Meaning-Out) 특성도 이유로 들 수 있다. 염재승 텀블벅 대표는 "최근 제작자와 투자자 모두 자신의 사회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펀딩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앞으로 텀블벅 펀딩은 자신이 품고 있는 가치를 타인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텀블벅에서는 평화인권 운동가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 펀딩이 진행됐다. 이 펀딩은 이틀 만에 1000만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으며, 최종적으로 목표 금액의 200% 이상을 달성했다. 이처럼 예산 부족과 흥행의 불확실성, 상영관 확보 어려움 등으로 상업 영화계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이 펀딩을 통해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자는 보통 영화 관람권 가격인 단돈 1만원 정도로 그동안 상영되기만을 기다렸던 영화를 직접 개봉시킬 수 있게 됐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자신의 취향과 신념에 맞는 제품에 투자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소비를 주도하면서 덕투일치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와디즈는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중심축이 밀레니얼 세대로 이동하면서 자기 만족적 '가치 소비'를 하는 경향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텀블벅은 "밀레니얼 세대는 유명 대기업 제품을 좇기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함께 키워나가려는 욕구가 강하다. 구글링이나 소모임을 통해 관심사를 빠르게 학습하고, 취향을 바탕으로 소통하는 데 익숙한 세대"라며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브랜드를 창출하고 탄탄한 팬덤을 끌어모은다"고 설명했다.
[디지털뉴스국 김설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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