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B 헐버트 박사의 70주기 추모식이 9일 열린 가운데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누리꾼들의 관심이 높다.
미국 출신 헐버트 박사는 1886년 23세의 나이에 한국에 왔다.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다 외교 자문을 맡아 고종을 보좌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고종 친서를 품고 미국에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또 자신이 창간한 영문잡지 '한국평론'에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기도 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지원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눈엣가시 헐버트 박사를 한국에서 추방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기고를 통해 한국 독립을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헐버트 박사는 약 40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라는 생전 그의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회장이 치러졌다. 정부는 1950년 헐버트 박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캐나다 출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헌신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수의사였던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했다. 그는 '석호필((石虎弼·단단하고 무섭고 남을 돕는다)'이라는 한국식 이름도 가졌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고 독립운동의 실장을 체험하여 기록했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피해 학생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또 일제가 저지른 만행인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 등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는 "한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했고,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언론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됐다. 특파원으로 내한한 베델은 1904년 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고종 황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일본은 영국인인 베델의 언론 활동을 탄압하기 어려웠다. 베델은 심장확장증으로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였다.
[디지털뉴스국 유정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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