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화가를 꿈꿨던 건축가 이타미 준의 바다
입력 2019-08-05 16:12 
화가이자 간축가 이타미 준

재일 한국인 이타미 준(본명 유동룡·1937~2011)은 낮에는 건축가로, 밤에는 화가로 살았다.
깊은 밤 술을 마신 후 손가락에 붉은 물감을 묻힌 후 화면에 꾹꾹 눌렀다. 유년 시절 추억을 떠올리면서 석양에 물든 바다 물결을 작품 '바다로부터(From Sea)'에 강렬하게 펼쳤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후지산 아래 해안 도시 시즈오카에서 자랐다. 서울 홍지동 웅갤러리 개인전 '심해(心海)'에서 온통 붉게 타오르거나 푸르게 일렁거리는 대형 유화들은 바다에 대한 기억의 잔상들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딸이자 건축가 유이화 씨는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만 그렸다. 아침 바다, 칠흑같은 밤바다, 어부의 그물, 파도 흔적을 화폭에 담았다. 바다에 대한 로망을 늘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타미 준 'Work'(53X45.5cm)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던 이타미 준은 "나는 캔버스 위에서 연주를 한다"고 이야기했다. 도구가 아닌 몸으로 화폭에 감정을 분출하고 싶어서다. 딸의 기억 속 아버지 손톱 아래에는 늘 물감 찌꺼기가 있었다. 유이화 씨는 "아버지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즉흥 연주를 하듯이 그림을 그렸다.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새벽까지 작업했다"고 회상했다.
손의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한 작가는 컴퓨터와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건축 설계도를 그릴 때도 연필을 잡은 그는 "디지털이 건축을 망치고 있다. 손의 온기로 만든 건축을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 건축가가 되겠다"고 했다.
이타미 준 'Work'(193.9X130.3cm)
고인은 어딜 가든 "화가이자 건축가 이타미준입니다"고 소개할 정도로 화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원래 꿈이 화가였지만 부친의 반대로 무사시공업대학(현 도쿄도시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축도 현대미술'이라고 생각하고 본인 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일본에서 곽인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국 추상화 거장 이우환 등과 모노하 운동에 참여했지만 건축가로서 명성이 더 앞섰다. 도쿄 '인디아 잉크하우스', '도쿄 M 빌딩', 훗카이도 코마코마이 '석채의 교회' 등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로 200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 훈장', 2006년 '김수근 문화상', 2010년 일본의 '무라노 도고'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2003년에는 프랑스 파리 기메 국립미술관이 건축가로는 최초로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건축가'전을 열었다.
이타미 준 '바다로부터(From Sea)'(130.3 X97cm)
그는 일본에서 살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평생 귀화를 거부하고 일정기간마다 외국인 등록을 위해 열 손가락의 지문을 날인했다. 다만, 그의 성씨인 유(庾)는 일본에선 쓰이지 않는 한자라서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글로벌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처음 비행기를 탄 오사카 이타미(伊丹) 공항 이름과 호형호제하던 작곡가 길옥윤(吉屋潤)의 마지막 글자 윤(潤, 일본어 발음 준)에서 따와 일본식 이름을 지었다.
한국 백자와 민화도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그는 "도자기는 스승이다. 도공의 무심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고독한 새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어루만졌다.
고인은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방문했다. 제주 핀크스골프클럽과 포도호텔, 바람·돌·물 미술관, 두손미술관, 방주교회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타미 준 딸이자 건축가 유이화
유이화 씨는 "아버지 건축 인생이 꽃피운 대지가 제주도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제주 바다에 몸을 담그면서 '심신을 소독했으니까 이제 잘 살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친이 사랑한 제주도에 재단법인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을 설립했고, 건축기념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전시 수익금이 건축비로 쓰일 예정이다. 전시 기간에 맞춰 8년간 준비한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15일 개봉)도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난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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