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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D.Y.SUN’ 38년 만에 이뤄진 양키스의 구애
입력 2019-07-11 13:35  | 수정 2019-07-11 13:45
뉴욕 양키스의 스티브 윌슨 총괄 스카우터(오른쪽)가 11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선동열 전 야구대표팀 감독(왼쪽)과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서울 목동)=김영구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서울 목동) 이상철 기자
‘국보급 투수가 뉴욕 양키스 선수단에 합류한다. 지금은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다. 양키스의 러브콜이 38년 만에 이뤄진 셈이다.
선동열(56)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2020년 2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로 출국해 양키스의 스프링캠프 일정을 소화한다. 현장 및 프런트 업무를 둘러보며 선진 야구를 배울 계획이다.
선 감독의 미국 생활은 계획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 스프링캠프를 마친 후 구단과 상의해 정규시즌까지 1년 일정으로 양키스의 모든 걸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양키스가 한국인 지도자를 초청한 건 선 감독이 처음이다. 양키스 관계자는 구단에서는 전설적인 투수였던 감독님이 오신다는 것만으로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현재 메이저리그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양키스의 현장 및 프런트 업무 모든 걸 경험하실 수 있도록 제공할 생각이다”라고 전했다.
양키스가 선 감독을 예우하는 건 ‘선수 선동열을 예우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 담당 스카우터에게 D.Y.SUN(선동열) 같은 투수를 찾아라”는 주문을 할 정도다.
선 감독과 양키스의 인연은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 감독도 양키스 유니폼을 입을 뻔했다.
선 감독은 1981년 미국에서 개최한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를 수상했다. 고려대 1학년 시절이었다. 양키스를 비롯해 밀워키 브루어스, LA 다저스 등 메이저리그 팀이 관심을 표명했다.

1984 LA 올림픽에는 야구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 선 감독도 대표팀에 발탁돼 참가했다. 한국은 4위를 기록했다. 양키스는 LA 올림픽 후 다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50만달러를 제안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상위 지명 선수들의 계약금이 15만달러 수준이었던 걸 고려하면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선 감독도 미국행 의지가 강했다. 프로팀이 아니라 한국화장품을 택한 것도 미국 진출을 겨냥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선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아마추어나 프로에서 5년을 뛰어야 했다. 당시 해태 팬의 바람에 결국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그런데 그때는 FA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다. 메이저리그에 가지 못하고 계속 해태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미국에서 뛸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선 감독은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주니치 드래건스(일본)와 계약했다. 1999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끈 선 감독은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턴 레드삭스가 관심을 표명했다.
곧 마흔을 앞둔 투수였다. 햄스트링, 무릎 상태는 안 좋았으나 어깨, 팔꿈치 상태는 20대 후반 선수와 비슷할 정도로 좋았다. 선 감독도 메이저리그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었다.
선 감독은 미국에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보스턴이 제시한 금액이 (주니치에서 받던 수준이면 괜찮았던)내 생각과 차이가 컸다. 은퇴를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돈 때문에 흐지부지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그만뒀다. 가족의 반대도 심했다”라고 말했다.
머나먼 길을 돌았으나 선 감독은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오랜 인연이 있던 양키스의 구애로 꿈을 이뤘다. 선 감독은 한·미·일 야구를 다 경험하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야구는 내게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 접하고 싶었던 미국 야구였다. 어린 시절 꿈이 현실이 됐다”라며 기뻐했다. rok1954@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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