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에 또 한 번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김혜순 시인이 쓰고 최돈미 시인이 번역한 장시집 '죽음의 자서전(영문명 Autobiography of Death)'이 캐나다의 권위 높은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의 2019년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돼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자주 후보로 오르내릴 정도로 그리핀 시 문학상은 시 부문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상으로 정평이 높다.
캐나다 그리핀 재단은 6일(현지시간) 온타리오에서 열린 그리핀 시 문학상 시상식에서 '죽음의 자서전' 영문판을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브 조셉 시인의 시집 '불만(Quarrels)는 캐나다 자국 부문 수상작으로 함께 선정돼 연단에 올랐다. 그리핀 시 문학상은 정확히는 시인이 아닌 시집에 주어지는 상으로, 영어로 쓰였거나 번역된 시의 초판본을 대상으로 삼는다.
`죽음의 자서전` 영문판 `Autobiography of Death.
올해는 세계 32개국에서 날아든 시집 37권이 후보작이었다. 그리핀 시 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죽음의 자서전'을 두고 "한국의 세월호 사건 이후 김혜순 시인은 매일 49편의 시를 썼다. 망자들은 매일 환생을 기다려야 했다. 최돈미 시인의 놀라운 번역에 의해 우리는 이전에는 노래한 적이 없는 시를 듣게 된다. 시인은 죽음조차 자기 안에 깊이 들어갈 수 없기에 노래를 부른다"라고 상찬했다.한국에서 2016년 출간된 '죽음의 자서전'에는 2015년 지하철역에서 갑자기 쓰러진 경험을 토대로 시인이 쓴 49편의 시가 담겼다. 소제목을 달리하며 49일간의 서로 다른 죽음을 교차시킨 점이 특징이다. 쓰러진 뒤 몽상 속에 죽음을 경험한 시인은 49일간 49번의 제(祭)를 올리듯 시를 써내려갔다. 죽음은 개인적 명멸이 아니라 세월호나 5·18민주화운동 등의 사회적 죽음으로 어른거린다.
'49'라는 숫자에 기대 이뤄진 형식적 측면의 미학적 성취 이면에서 시선(視線)이 더 독특한 시집이다. '죽음' 그 자체의 시각에서 인간을 기록한 자서전이란 점에서 그렇다. 김혜순 시인도 책의 '시인의 말'에서 시를 쓰던 마음을 이렇게 실토한 바 있다.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 아팠다. 죽음이 정면에서,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한국어로 쓰인 '죽음의 자서전'이 지난해 최돈미 시인에 의해 언어의 옷을 갈아입으며 'Autobiography of Death'란 제목으로 영미권에 출간된 직후 이 시집은 한국 시의 지평을 넓히는 사건으로 지속 회자됐다. 미국 펜 아메리카 재단이 주관하는 2019년 펜 아메리카 문학상' 최종 결선 후보에도 올랐다. 미 주간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구조적인 공포와 개인적 상실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김혜순 시인은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했고 '또 다른 별에서'부터 '날개 환상통'까지 시집 13권을 냈다. 현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다. 최돈미 시인은 미국에서 활동중인 시인으로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자행한 대학살을 다룬 시집 '전쟁이 일어나자마자(Hardly War)'과 '아침의 소식은 흥미롭다(The Morning News is Exciting) 등을 출간한 바 있다.
그리핀 시 문학상은 199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가 수상할 정도로 권위가 깊은 상이다. 상금은 각각 6만5000만원(약 5700만원)으로 원작자와 번역가가 나눠갖는다. 한편, 한국의 고은 시인이 2007년 그리핀 시문학상의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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