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설가 김훈, 하회마을 만송 아래서 시대를 반성하다
입력 2019-06-02 15:25  | 수정 2019-06-02 15:47
김훈 소설가가 지난 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이란 주제의 특강으로 청중과 만났다. 안동 하회마을은 그의 산문집 `자전거여행`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장소다. [김유태 기자]

"우리 사회는 악다구니와 쌍소리, 욕지거리로 날이 지고 샌다. 몇 년째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어진 세상이랄까···."
백발의 노작가가 만송(萬松) 아래서 혀를 찼다. 경북 안동의 드높은 소나무를 등지고 앉은 700여명의 청중이 그의 입을 쳐다봤다. 꾸짖고 다그치는 험담보다는 시대를 타이르듯 나직하게 읊조린 이는 소설가 김훈(72)이었다.
지난 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열린 '백두대간 인문 캠프' 특강에서 김훈 작가는 청중들과 함께 안동의 역사적 정취를 돌아보고 현시대와의 호흡을 느끼는 기행길의 오후를 맞았다.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부재하는 시대의 반성을 그는 요구했고 대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전국에서 몰려든 독자들은 저음에 귀를 기울이며 숙연해졌다.
"세상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왜 떠들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됐다. 어수선하고 천박한 세상이다. 우리 사회의 모두가 혓바닥을 너무 빨리 놀린다. 다들 혀를 놀리는데, 그 혀가 생각을 경유해 나오지 않았고 혀가 날뛰도록 내두는 사회로 전락했으니···. 네가 나한테 침을 뱉으면 나는 네게 가래침을 뱉는 세상이 됐다. 이런 나라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김훈 소설가가 지난 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이란 주제의 특강으로 청중과 만났다. 안동 하회마을은 그의 산문집 `자전거여행`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장소다. [김유태 기자]
안동은 2001년작 산문집 '자전거여행'에 등장하는 도시다. 안동의 길과 집에서 인간(人間)의 면모를 그는 오래 전 정확히 포착했다. 책의 구절을 잠시 옮기면 이렇다.
'하회의 집들은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않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도 않다. 하회의 집들은 서로 어슷어슷하게 좌향을 양보하면서, 모두 자연 경관을 향하여 집의 전면을 활짝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날 김훈의 주제도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이었다. 김훈은 길과 집, 나아가 '거리'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청중에게 가닿았다. "집과 집 사이의 길들은 물이 흘러가듯 구비친다. 길이 달려들지 않고 옆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존재와 존재가 맞딱뜨리지 않고,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비스듬히 응시하는 관계···. 저들은 간격 위에서 평화를 이룩한다."
김훈 소설가가 지난 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이란 주제의 특강으로 청중과 만났다. 안동 하회마을은 그의 산문집 `자전거여행`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장소다. 강연을 마친 뒤 몰려든 독자들과 만난 김훈 작가가 책에 사인하고 있다. [김유태 기자]
전통과 개혁이 공존하는 마을이 바로 안동이란 김훈의 평도 잇따랐다. 안동은 600년 세월에도 전통의 가치를 지켜 선비문화를 전파하면서도 일제 시대엔 독립운동 총본산이었다. "독립운동 지도자 밑에서 주민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전통의 힘에 의해 현실을 개조할 수 있음을 안동 독립운동을 이끈 개혁적 유림들은 보여줬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하회마을을 비롯해 '안동 모스크바'로 불리는 오서(五敍) 권오설 선생의 고향 동성마을도 항일투쟁의 본산이었다. 김훈은 말을 이었다. "안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자자손손 쌓아온 기득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전통 안에서도 현실을 개혁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알았다."
'이육사'란 세 글자도 이쯤에서 나왔다. 이육사 고향은 이곳 안동이었다. "이육사는 직업 시인이 아니라 '직업 혁명가'다. 그의 시 '광야'는 혁명의 부산물로 얻어진 시다. 그의 생각과 행동의 뿌리는 안동에 있으며, 유가적 전통 위에서 혁명을 도모한 분이다." 전통을 둘러싼 고민은 만송의 바람 사이로 깊이를 더하며 응집했다.
"우리가 전통이란 힘의 바탕 위에서 현실을 계속 개혁해나갈 수 있을까···. 그건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근대화와 개혁은 반드시 전통을 박멸한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을 우리는 해왔다. 전통적인 힘을 근대화의 동력에 연결하는 일에 매우 소홀했거나 매우 등한시 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무서운 일이다."
고통을 성찰하는 '징비록' 얘기로도 고민은 뻗어나갔다. 낙동강 지류에 올려진 외길 섶다리 저 너머로,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던 장소인 '옥연정사'를 응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김훈 소설가가 지난 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이란 주제의 특강으로 청중과 만났다. 강연에 앞서 기자와 월영교 인근의 이육사 시비를 찾은 김훈 소설가. [김유태 기자]
"임진왜란 7년 뒤엔 잿더미와 시체뿐이었다. 서애 선생은 저 자리에서 미래를 연 거다. 고통의 시대를 정직하게 돌파한 성인들은 저 위의 이상이 아니라 마을이란 이름의 현실에 속해 있었다."
한편, 이날 김훈 작가의 강연을 듣고자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을 찾은 이점숙 씨(59)는 "하회마을이란 유서 깊은 고장에서 김훈 선생님과 함께 세상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고 털어놨다. 그의 손에는 2001년판 '칼의 노래' 초판본이 들려 있었고, 특강을 마친 김훈 작가는 검은 펜으로 서명을 남겼다.
경상북도가 주최하는 행사로 시작된 '백두대간 인문 캠프'는 시인과 소설가 등 인문학 명사를 초청해 작가와 동행하며 1박 2일을 지내는 인문기행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김훈 작가가 서장을 열었고 안도현 시인(7월 6일·예천 용궁역), 정호승 시인(9월 28일·예천 금당실마을), 이원복 만화가(10월 12일·하회마을)가 순서대로 청중과 만난다.
[안동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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