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간호사들의 `진짜 세계`가 궁금하다고요?"
입력 2019-05-17 15:40 
웹툰 '리얼 간호사 월드'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최원진씨 인스타그램]


"나 롤케익 먹고 체했는데, X먹이려고 일부러 사 온 거야? 이런 건 너나 처먹어!"
간호복을 입은 캐릭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롤케익을 던진다. 공중에 붕 뜬 롤케익이 이내 다른 간호사의 얼굴에 명중한다. 다음 장을 넘기자, "10년 차가 된 지금, 롤케익은 쳐다도 안 봅니다"라는 글씨와 함께 정색하는 간호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웹툰 '리얼 간호사 월드'의 한 장면이다.
현직 간호사 최원진 씨(26)가 그리는 '인스타툰'(인스타그램에 연재하는 웹툰) 리얼 간호사 월드는 요즘 온라인상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만화다. 그림체도 화려하지 않고, 한 편을 읽는데 15초도 걸리지 않을 만큼 컷 수도 적지만 흥미롭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의료계의 생태를 미화 없이 적나라하게 담아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매경닷컴은 16일 최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주사기 대신 펜을 잡은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간호사들끼리 '나 이런 일 있었어'하며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더라고요."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최씨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동종 업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며 "그림 그리는 게 취미라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얘기했던 내용을 만화로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간호사들의 삶을 전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끼리 장난 반 진담 반 하소연하려고 올린 만화가 간호사들의 '대나무숲'으로 거듭난 건 딱 1년 만이다. 최씨는 지난해 정식으로 만화를 그린 이후 1만명이 넘는 독자를 끌어모았다. 대부분 같은 일을 하는 간호사들이다. 이들은 최씨의 만화를 통해 위안을 얻고 때로는 어디서 말 못 할 사연을 써 보내기도 한다. 최씨는 "한 편을 올릴 때마다 사연이 2~3개씩 꾸준히 온다"며 "지금까지 100여 건이 넘는 사연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른바 '태움'이라 불리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신규 간호사부터 환자들에게 성희롱을 당한 이들까지 제보자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의료계의 생활을 깊게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귀를 의심하게 되는 경험담밖에 없다. 최씨는 전해 받은 사연을 차례대로 그리며 때때로 이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짤'을 첨부한다. 개그맨 박명수가 욕을 읊조리는 사진이 그 예다. 진상 환자나 괴롭히는 선임의 면전에 대고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대신 해주는 셈이다.
웹툰 '리얼 간호사 월드'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최원진씨 인스타그램]
"얼마나 힘들길래…" 고 묻자 최씨는 "이직을 고민할 정도"라며 짧지만 강한 답변을 내놨다. 간호사들의 고충은 웹툰 작가가 아닌 간호사로서 최씨의 삶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일하던 신입 시절을 회상하며 "굉장히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너무 바빠서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언제 한 번은 환자 소변량을 확인하려고 쭈그려 앉았는데 순간 다리에 핏줄이 터진 적도 있었어요. 항상 긴장한 채 다리에 힘을 주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얘기하는 최씨의 말에 고단함이 묻어있다.
이어 그는 "높은 업무 강도만큼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다"며 "같은 이유로 그만둔 동료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 말에 간호사 10명 중 8명이 '이직 의향이 있다'고 답한 한 설문조사 결과가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움을 겪은 적이 있냐고 조심스레 묻자 "직접적으로 겪은 건 없지만 주변에서 많이 당했다"고 답했다.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 신입 간호사를 빼놓고 간식을 나눠 먹는 건 그나마 귀여운 축에 속했다.
태움은 폭언부터 직접적인 폭행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최씨는 "선임에게 인사를 했더니 다짜고짜 욕을 들은 친구도 있다"며 "심하게는 발로 차이고 멱살을 잡히는 경우도 있다"고 답했다. 간식으로 싫어하는 롤케익을 사 왔다고 후임 얼굴에 냅다 던지는 에피소드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개개인의 잘못도 물론 있지만 열악한 근무 환경이 악습을 만들어낸 것 같다"며 "고된 노동을 계속 하다 보면 상상 이상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일부 환자들의 무차별적인 폭언과 성적인 농담도 간호사들이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의 만화에도 "아가씨, 처녀야?"라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환자부터 다짜고짜 물세례를 퍼붓는 환자 등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는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막 대해도 되는 만만한 여자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일에도 달리 말할 데가 없는 것이 이들의 실정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직장인들이 그러겠지만, 간호사들도 혼자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분들이 만화를 보고 소소하게나마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최씨는 인터뷰를 맺으며 소박한 바람을 남겼다. 또 "모든 간호사들은 환자와 의사 중간에서 보이지 않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라며 "이 점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요"라고도 강조했다. 최씨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리얼 간호사 월드'는 생각보다 더 혹독했으며, 그 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디지털뉴스국 이유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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