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수 민족 차별을 넘어선 탁월한 필력…러시아서 되찾은 천재 한인 화가 변월룡
입력 2019-04-24 11:23 
변월룡 1953년 유화 '개성 선죽교'(36, 55cm)

배에서 줄지어 내리는 사람들이 구름떼 인파 앞에서 울고 웃는다.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 재일동포들의 감격이 가늘고 치밀한 선(線)에서 요동친다.
러시아 국적 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의 1960년 동판화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부러움과 그리움을 새긴 작품이다. 그는 1959년 평양을 방문하려 했으나 북한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1953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평양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실주의 미술을 전수했지만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그의 아내가 러시아인이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시 북한으로 갈 수 없는 답답한 심경을 글귀 '보고 싶은 청진을 보지 못하고 레닌그라드에서 깊은 생각만 가지고 그렸습니다. 변월룡'으로 동판화 우측 상단에 새겨넣었다.
북한에서 숙청당하고 남한에서는 존재조차 몰랐던 변월룡의 작품 세계는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미술평론가 문영대 씨가 1994년 국립러시아미술관에 전시된 변월룡 그림을 발견한게 계기였다. 북한 엄마와 소녀가 소나무 길을 걸어가는 정겨운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문 씨는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걸린 그림에 한국적인 정서가 배여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색감과 비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변월룡 1953년 유화 '햇빛 찬란한 금강산'(78, 59cm)
당시 러시아어를 몰랐던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다시피 '? 봐를렌'(변월룡의 러시아 이름)을 적은 후 작가를 찾아나섰다. 20년 넘게 작가를 연구하고 삼고초려로 유족을 설득한 끝에 2016년 국내 전시가 성사됐다.
잃어버린 화가 변월룡을 알게 된지 3년 만에 상업 화랑 학고재에서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 전이 열린다. 회화 64점, 판화 71점, 데생 54점 등 189점을 둘러보면 그의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소수 민족이 러시아 국립 레핀대 교수가 된 배경은 역시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특히 동판화 기술은 그가 존경했던 네덜란드 거장 렘브란트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전시에 1953년 유화 '햇빛 찬란한 금강산', 1977년 유화 '가을', 1974년 초상화 '토고인 제자 라이몬도 델라케나' 등이 처음 공개된다. '햇빛 찬란한 금강산'은 1953년 북한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듯이 정성스럽게 절경을 묘사했다. 가옥과 의복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평양과 개성 풍경화를 보면서 당시 북한 모습을 짐작해본다. 그 시절 북한에서 만난 무용가 최승희, 화가 문학수, 정관철 미술가동맹 대표, 소설가 이기영, 미술사학자 한상진 등을 그린 초상화도 귀중한 사료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화력이 뛰어났던 변월룡은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변월룡 1960년 동판화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는데도 한반도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인다. 북한을 떠난 후에는 소나무와 사슴,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그리면서 향수를 토로했다. 단풍을 그린 '가을'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사슴이 다름 아닌 작가를 은유한다. 그가 잠든 상트페테르부르크 묘지에도 한글 이름을 새겼다.
변월룡 1977년 유화 '가을' (80, 90cm)
그렇다고 그가 러시아에서 불행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전용 택시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작품이 잘 팔렸다. 그 시절 사할린에서 포르투갈까지 유라시아 대부분 국가를 여행했을 정도로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레핀대 부교수에서 정교수가 되는데 25년 걸리는 등 가슴 한편에 민족 차별에 대한 응어리가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평양미대 학장으로 자기를 인정해준 북한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을지도. 1963년 고국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하고 그린 유일한 미완성 자화상에서 눈물이 글썽인다. 전시는 5월 19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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