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외유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에 그동안 그림자 수행을 해온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빠져 주목됩니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지난해 한반도의 정세 변화 속에서 김 위원장의 최측근으로 정상외교와 대미외교 전반을 보좌해온 인물이어서, 이번 방러 대표단에서 빠진 것이 앞으로 대남 라인의 핵협상 배제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습니다.
러시아는 이번 북러정상회담의 핵심의제가 한반도 비핵화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현지시간으로 어제(23일) 기자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 대통령(푸틴 대통령)이 방러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회담할 것"이라며 "핵심 관심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의 정치·외교적 해결이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핵 문제가 주요 의제임에도 김영철 부위원장이 배제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일단 북한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대미 협상과 정책 전반을 검토하고 평가하면서 조직도 재정비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하노이 회담의 성공에 자신했던 북한 입장에서 '빈손'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고 북한도 이를 숨기지 않은 만큼, 협상과정에 대한 평가와 해결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통전부에 책임을 물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책적 오류와 판단 착오의 책임을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에게 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대미 협상을 주도해온 통전부에 책임을 물은 것은 어쩌면 불가피했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대미 핵협상에 깊이 개입했던 통전부 인사인 김성혜 통일책략실장과, '김영철 라인'으로 평가되는 김혁철 국무위 대미특별대표의 경질설도 제기합니다.
이런 연장선에서 북한은 하노이 회담 이후 대미외교와 협상 전반을 종전처럼 외무성이 주관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근본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미 협상 원칙을 천명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제재 해제에 목을 매 미국의 '일괄타결'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포스트 하노이' 대미정책 방향과 원칙을 선언한 만큼, 과거의 방식으로 대미 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는 겁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2기 권력 재편 직후 지난 13일 노동당 집무실에서 국무위원회 간부들과 찍은 사진에서도 외무성의 부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속의 이 사진에서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은 김정은 위원장과 같은 소파에 앉았으며, 그것도 서열 10위 내 김재룡 신임 총리와 리만건 당 조직지도부장의 옆에 앉아 높아진 위상을 과시했습니다.
반면 김영철 부장은 뒤 줄에 리수용(국제)·태종수(군수) 당 부위원장과 나란히 서 핵협상에서 한발 발을 뺀 통전부의 현주소가 드러났습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방러에 외교 인사로 대미 협상의 베테랑들인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 두 사람만을 데리고 간 것은 외무성이 향후 핵 협상의 주역으로 부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서 김정일 정권에서 핵 협상은 외무성의 고유 전담이었고 리 외무상과 최 제1부상 역시 자타공인 북한을 대표하는 대미 협상의 핵심 실무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작년 김정은 정권의 핵협상이 시작되면서 조연에 그쳤고 주역은 당 통일전선부였습니다.
통전부가 남쪽의 국가정보원과 물밑 채널을 통해 남북관계를 열었고, 국정원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와 통전부 라인을 중계하면서 이뤄진 구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김영철 통전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3차례 남북정상회담과 4차례 북중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에 유일하게 배석했고, 김 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해 도널드 크럼프 대통령을 두차례 만났습니다.
심지어 통전부의 김성혜 실장도 김영철 부장을 수행하며 북미 협상의 핵심 실무자로 자리했습니다.
사실 국정원-통전부-CIA 구도에 따른 통전부 중심의 핵 협상은 이례적이고 일시적이었다는 점에서 외무성이 핵협상을 도맡는 것은 북한 외교의 정상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통전부의 대미외교 배제는 향후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남측의 중재자·촉진자 역할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동안 남북정상회담과 고위급회담, 남북 간 물밑 대화 과정에서 통전부를 통해 북핵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이 가능했지만, 핵 협상의 주역이 외무성으로 바뀌면 그만큼 핵문제에 대한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에서 고위인사가 부침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고, 현안에서 잠시 뒤로 밀렸다가 복귀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김영철 부위원장은 그동안 갖고 있던 직책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 러시아 방문 수행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을 영향력의 약화로 볼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