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인터뷰] 25년 에어컨 기사가 택한 길 "추락사고 줄이려고…"
입력 2019-04-24 08:54  | 수정 2019-05-03 08:03
한 에어컨 기사가 고층 아파트에서 실외기 설치를 하는 모습. [사진출처 = 민병수 대표]

"생명을 구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에어컨 설치기사들의 추락사고. 지금도 이들은 밸브를 조이기 위해 1평 남짓 좁다란 거치대에 오른다. 한쪽 다리를 바깥으로 뺀 채 온 몸은 얇은 거치대에만 의지한 이들에게 안전은 찾아볼 수 없다. 위험한 곳에 설치를 금하는 안전 규정도 사실상 없다.
에녹테크(Enochtech) 민병수(57) 대표는 에어컨 실외기 설치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명사고'를 줄이기 위한 특허품을 개발했다. 이 제품은 실외기 설치 시 파이프만 밀어 넣어 체결하는 '서비스 밸브'다.
민병수 에녹테크 대표와 특허 발명품.
기존 실외기 설치를 위해서는 투인원에어컨(스탠드형+벽걸이형)의 경우 파이프 너트를 삽입한 후 나팔확관기로 실내외기를 포함한 파이프 총 8군데를 나팔모양으로 만들어 체결해야 한다. 가스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멍키스패너로 힘껏 조이는 것도 필수다. 이는 작업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물론 공구를 바꿔가며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번거롭다.
반면 민 대표의 특허품은 파이프를 서비스 밸브에 밀어 넣기만 하면 된다. 파이프를 고정해주는 강력한 손잡이 구조 때문에 고정력도 좋다. 물론 기존에도 비슷한 원터치 기술이 있지만 파이프 삽입 시 긁힘이 발생해 쉽게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 대표의 특허품은 파이프를 긁힘 없이 강력하게 잡아주기 때문에 절대 빠지지 않는 구조로 설계됐다.
파이프를 삽입하고 분리할 때는 손잡이를 열고 닫기만 하면 돼 조작도 쉽다. 이 모든 과정은 도구 사용 없이 '손'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고층에서 도구를 떨어뜨려 발생하는 안전사고도 예방할 수 있다.
민 대표는 "이 특허품은 공구사용 없이 파이프만 밀어 넣기만 해 빠르고 안전한 설치를 보장한다"며 "밸브와 파이프 체결 및 철거 시 공구가 필요 없을 뿐더러 배관연장 시 용접과정이 생략돼 화재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에어컨 물류팀 협력업체 설치기사로 25년간 종사하기도 한 그는 그간 많은 동료들을 사고로 떠나보냈다. 특히 재작년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에어컨을 설치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말하는 그는 당시 기억을 되뇌며 먹먹해했다.
민 대표는 "동료들의 죽음과 사고를 옆에서 지켜보며 한 사람이라도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바람으로 이번 아이템을 개발하게 됐다"며 "이를 통해 인명사고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 대표는 에어컨 설치에 특허품이 도입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민 대표는 "투인원에어컨의 경우 기존 설치과정이 4~5시간이 걸리지만 해당 기술이 도입되면 절반인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면 설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기업입장에서 도급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당 아이템은 기존 밸브보다 원가 측면에서 2배가량 비싸지만 설치시간과 신속도 등의 이점으로 기업은 연간설치 도급비용 지출을 파격적으로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 대표는 "상품에 따라 투인원의 경우 설치금액이 고가이고 단품스탠드는 그보다 훨씬 저렴한 도급비로 노동 대가가 다르게 정해진 것처럼 신속한 설치가 가능해지면 기업 입장으로서는 도급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기사는 하루 평균 3.5건에서 5~6건 설치로 늘며 안전하면서도 빠른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실외기 체결방식과 특허품 체결방식 비교.
실제 에어컨 실외기 체결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는 해마다 반복된다.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자 회사 측에서는 안전 장비를 공급해 설치 작업 시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쉴 틈 없이 몰려오는 설치건수에 기사들에게 안전장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추락을 막아줄 안전줄을 묶을 곳도 마땅치 않다. 안전줄은 난간에 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마저도 튼튼하지 않다. 지켜보는 주민에게도 아찔한 공포다. 민 대표는 "실제 작업 환경에 나가보면 안전장비를 하고 설치할 겨를이 없다. 시간에 쫓길 뿐더러 안전줄을 걸만한 곳이 난관밖에 없는데 이 마저도 튼튼하지 못해 위험하다"고 말했다.
많이 설치하면 할수록 많이 버는 임금 구조도 문제지만 '빠른 시간 내 소비자들의 설치 요청을 처리하라'는 회사의 독촉도 만만찮다. 늘 시간에 쫓기다 보니, 안전 장구를 갖출 여유가 없는 그야말로 시간과의 전쟁인 것이다.
민 대표는 자신의 특허품이 도입되면 설치비율 90% 이상 몸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이 설치가 이뤄져 기사들의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획기적인 기술로 자리 잡을 것으로 확신한다.
민 대표는 "올해 1월부터 서울시 신축건물에 한해 실외기를 외벽에 설치하지 못하는 대책이 시행됐는데 이는 해마다 발생하는 인명사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며 "신축건물보다 외벽으로 걸어야만 되는 기존건물 환경이 더욱 많기 때문에 본 아이템은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허품 발명 계기로 사회적으로 더 이상 설치 추락사고가 없기를 바란다"며 "인명을 구조하고 사회 공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에어컨 설치에 대한 안전 가치를 확산하려는 민 대표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은 긴 여정이었다. 변변한 초기 자금 조차 없었고 제품 개발부터 테스트까지 직접 발로 뛰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외롭고 고달팠다. 하지만 값지고 보람된 일이 될 거라 말하는 그의 표정은 환했다. 현재 민 대표가 개발한 특허품은 성북구 시니어기술창업센터 심사평가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사고를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고민해 온 민 대표의 긴 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이른 듯 했다. 생명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온 그의 신발 뒤축은 꽤나 닳아있었다.
[디지털뉴스국 김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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