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어렸을 때 형성된 성격은 잘 안바뀐다는 전제 하에 성격장애 초발 진단이 10대 후반이나 20대초반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어른들은 성격장애로 인한 범죄가 발생한 이후에야 성격장애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청소년부터 중장년과 노년층까지도 성격장애 초발 진단이 가능해진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가 1990년 국제질병분류(ICD)에서 성격장애 진단기준을 정한 이래 약 30년만에 개정된 것으로, 올해 5월 WHO 총회 승인 후 2022년 1월 1일부터 194개 회원국에서 발효될 예정이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 교수가 아시아 대표자로 이번 성격장애 진단 개정에 참여했으며, 국내 현장연구 결과를 개정에 반영했다. 임상심리학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학술지인 '연간임상심리학리뷰' 2019년도 최신판에서 김율리 교수를 포함한 WHO 성격장애 개정실무그룹은 'ICD-11 성격장애 진단분류의 변화'에서 개정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김율리 교수는 "모든 성격 체계에서 진단의 심각도를 도입해 인간의 성격을 기존 범주형 대신 차원적으로 분류하고, 성격형태를 부정적 정동(감정, 정서, negative affectivity), 강박(anankastic), 고립(detachment), 반사회성(dissociality), 탈억제(disinhibition) 등 5가지로 분류했다"고 말했다. 또한 개정에는 진단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미한 성격 문제를 보이는 경우, '성격곤란(personality difficulty)' 이라는 하위증후군으로 새롭게 포함했다.
성격장애는 밀접한 대인관계가 특징인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특히 중요성이 부각되는 정신질환이다. 2010년도 WHO 조사결과 전 세계 인구의 성격장애 유병률은 7% 이상으로 나타났다. 성격장애 개인은 성격적 특성으로 인해 편향적이고 융통성이 없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인관계에 지속적이고 뚜렷한 문제를 보인다.
평소 괜찮다가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성격이 괴팍해지는 경우에서부터 악한 범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잔인한 범죄자까지, 그 심각성이 광범위하다. 그 밖에도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정서적으로 크게 동요되는 사람, 자신 및 상대방에게 지나친 완벽을 요구하는 사람, 은둔형 외톨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사람,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 등도 성격장애일 수 있다.
이번 개정은 국제질병분류의 성격장애 진단분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어 세계 의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다.
그 간 개정과정에서 일반의학분야 최고 학술지인 란셋(Lancet, 영향력지수 53.254)과 정신의학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학술지인 세계정신의학(World Psychiatry, 영향력지수 30.0) 등에서 개정실무위원회와 함께 성격장애 진단분류 개정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왔으며, 관련 학술단체들의 의견을 절충해왔다. 김율리 교수는 "만약 누군가 '심각'수준의 성격장애 진단을 받게 된다면, 이는 그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제 국내 보건의료체계에서도 성격장애 진단기준 변화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정책적 준비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